화장장 한켠 유골 수거 창구에 유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유족들은 들어갈 때와는 달리 그저 하얀 뼈 덩어리만 나오는 걸 허망한 눈으로 지켜봤다. 한 줌의 재로 변한 것을 보는 순간, 시신을 담은 관을 보고서는 그렇게 서럽게 울던 사람들도 유골 앞에서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슬픔이라는 것도 유형의 무엇이 있을 때 성립하는 것이지 먼지밖에 남아있지 않은 공허에 대해서는 그것이 느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잘 빻는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은 없어 보였지만 그저 잘 빻아달라고 부탁할 뿐이었다.

봉구 씨 가족은 화장장 구내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와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곡성을 동시에 들으며 묵묵히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렸다. 봉구 씨는 극심한 피곤함 속에 가족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처남 매부들끼리, 시누와 올케끼리. 그들은 각자 먹고사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이들이 대학가는 이야기, 취직 못 해 걱정인 이야기, 누구는 아들 잘 둬 좋겠다는 이야기, 봄에는 누가 시집간다는 이야기 같은. 죽은 자보다는 산 사람의 이야기를 했고, 후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이야기보다 훨씬 현실적일 뿐 아니라 적절하기까지 했다. 그들에게는 슬픔보다는 장례를 무사히 치렀다는 안도와 후련함이 깃들여있었다.

봉구 씨는 더 시간이 지난다면 이들은 서로 수고했다는 인사를 나눌 것이고, 체면치레했다 할 것이며, 그로서 피로를 달랠 것이다,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골을 수거하라는 장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은행 창구에서 ‘고객님’을 찾는 방송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업 사원이 앞장섰다. 그의 손에는 칠천 원짜리 목함이 들려있었다. 노련한 손놀림으로 유골 회수를 마친 남자는 구슬을 직접 찾으러 올 것인지, 택배로 배송할 것인지를 짧게 확인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가족들은 알 수 없었지만 남자는 다른 화장장을 또 돌아볼 심산이었다. 가족들은 멍한 표정으로 길어지는 남자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가로 초겨울 짧은 햇빛이 들어왔다. 싸늘한 바람이 분주히 열리고 닫히는 출입문 사이로 흘러들어왔다. 스치는 바람에 가족들의 얼굴이 딱딱하고 온기 없는 벽처럼 굳어져 있었다.

“저 양반도 참 등신이야.”

“그리 갈 걸 뭘 그렇게……, 안 지어도 될 농사를, 뼈 빠지게, 그래 죽는 날까지.”

“그래야 토지보상을 제대로 받는 데잖아, 그게 어디야.”

“죽은 때까지 새끼들, 새끼들 하더니 완전히 새끼들 좋은 일만 시켰구먼.”

“쉬! 듣겠다.”

“……”

구내 TV에서는 연합뉴스가 자살로 추정되는 교통사고 차량에서 부부로 보이는 두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화면을 자막과 함께 내보내고 있었지만 그 뉴스는 봄이 오기도 전에, 아니 화장장 흡연구역에서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한 흡연자들이 품어대는 담배 연기보다도 훨씬 더 빨리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질 것이었다. 지금은 초고속 5G 시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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