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공자(4)

不憤不啓 不悱不發 부분불계 불비불발
애태우지 않으면 가르치지 않고, 애쓰지 않으면 틔워주지 않는다 (<論語>述而)
공자가,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 애쓰는 사람이 아니면 가르쳐주지 않는다며

공자가 대사마가 되어 노나라가 안정을 되찾아가자 제나라 사람들은 이를 두렵게 생각했다.
제나라의 대부 여서가 경공에게 말했다.

“노나라가 공구(孔丘)를 중용했으니 그 세력이 커지고 나아가 우리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노나라에 제후끼리 회담을 제의하십시오. 회담 도중 기회를 보아 무력으로 노나라 제후와 공구(공자)를 제압하여 굴복시키겠습니다.”

제 경공이 그 말을 따라 노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제후끼리 ‘무장을 갖추지 않고’ 협곡이란 곳에서 만나 친선의 회담을 갖자고 제안했다. 비무장 평화회담을 가장해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제나라와 회맹에서 정공을 보호하다

정공은 제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무런 대비 없이 나가려 했다. 공자가 만류했다.

“신이 듣기에 제후의 일에는 문(文)의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무(武)를 갖춰야 하며, 무의 일에는 또 문이 따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제후가 국경을 나설 때는 반드시 문무관원을 함께 수행시켜야 합니다. 좌사마와 우사마를 임명하고 군사를 준비하게 하십시오.”

기원전 500년 여름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협곡에서 두 제후가 만났다. 제 경공은 재상 안영을 대동하고, 노 정공은 계환자를 대리해 임시 상국이 된 공자가 보좌했다.

제나라가 흙을 쌓아 만든 고대에 두 군주가 올랐다. 술잔을 나누고 화의의 맹약을 하려는 참이었다. 제나라에서 준비한 이민족 연주단이 북 치고 창과 칼을 부딪치면서 시끄러운 음악을 연주하며 등장했다. 그들이 계단 앞으로 몰려들자 공자가 빠른 걸음으로 앞서 올라가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천하의 가장 중요한 두 나라 제후들이 엄숙하게 맹약을 하는 자리에서 어찌 이리 경망스러운 이민족의 음악을 연주하는가. 모두 물러가게 해주시오.”

제 경공은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광대들을 물러가게 했다. 기실 그들은 노 정공과 공자를 에워싸고 포로로 만들 참이었다.

“이번에는 우리 궁실의 음악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제나라 관리가 신호를 보내자 제나라 궁실 악사들이 광대들과 함께 등장했다. 그들은 고대 아래서 국악을 연주했는데, 그것은 제나라가 노나라 제후를 욕보인 과거의 일을 희화하한 음악이었다.

“필부로서 함부로 제후를 희롱하다니 마땅히 처형해야 합니다.”

제 경공과 안영이 보는 앞에서 공자는 호위무사들로 하여금 광대들을 베게 했다.

제나라가 비무장을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통보했지만 정작 제나라 군사들은 무장을 갖추고 바로 회담장 가까이에 대기 중이었다. 제나라는 노나라 모르게 회담장 뒤에 군대를 감춰두었으나, 이를 예견한 공자가 똑같은 숫자의 병력을 대기시켜두었기 때문에 힘으로 밀어붙이지도 못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회담은 어정쩡하게 마무리되었다.

제나라 대부 여서가 꾸민 잔꾀로 제 경공은 되레 망신만 자초한 꼴이었다. 제 경공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사과의 뜻으로 예전에 노나라로부터 빼앗았던 성읍 3개를 되돌려주기로 약조했다. 공자를 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공자의 입지를 더 강화시켜주는 꼴이 되었다.

삼환의 성을 허물다

정공 13년 여름. 공자는 숙원이던 삼환의 견제를 구체화했다.

“신하는 사사로이 무기를 비축해서는 안 되며, 대부가 100치 이상의 성을 쌓아도 안 됩니다.” 이에 중유(자로)를 계씨의 가신으로 천거하여 숙-계-맹 삼환의 성을 해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마침 상경인 계씨는 자신의 영지인 비(費)성을 가신이던 공산불뉴가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 허무는 일에 기꺼이 찬동했다. 숙손씨 또한 자기 가신이 후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위험을 겪은 적이 있기 때문에 제후의 군대가 직접 성을 허물어준다는 데 기꺼이 찬동했다. 덕분에 일은 비교적 쉽게 진행되었다.

숙손의 후성을 허물고 계씨의 비성을 허물려고 할 때 예상한대로 농성중이던 공산불뉴가 저항했다. 공산불뉴는 비성의 사병들을 이끌고 느닷없이 곡부로 쳐들어왔다. 책임자인 공자는 이미 정보망 구축해놓고 이 날에 대비해왔다. 정공은 공자가 세워놓은 비상계획에 따라 세 아들과 함께 계씨의 궁으로 피신했다. 계무자의 누대에 올라서자 진격해온 비성 사람들이 집을 둘러쌌다.

“여기 군주가 계시다.”

공자는 먼저 호령하여 비성 사람들의 기세를 꺾은 다음, 정규군을 시켜 반란군을 치게 했다. 공자는 삼환의 성을 허무는 동안 적어도 한두번은 물리적 충돌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그에 대비해 왔다. 공산불뉴의 사병들과 대치한 뒤에는 성 안에서 치고나갈 정규군 외에 반란군의 후방에서 그들을 공격할 응원군까지 동원하는 전략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 작전에 따라 공산불뉴의 군대를 일거에 무너뜨렸다.

비성을 허물지는 못했다. 가신들의 반란이 진압되자 삼환의 생각이 달라진데다 제나라와의 국경에 있는 비성은 국방을 위해서도 유지해야 한다는 이견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의 정책은 어느 정도 목적이 달성되었다. 이후 삼환의 세력은, 그 누구도 단독으로는 제후를 능가할 수 없을 만큼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노나라가 공구(孔丘)를 중용했으니 장차 우리를 위태롭게 할 겁니다. 노나라에 제후회담을 제의하십시오. 기회를 보아 노 정공과 공구를 제압하여 포로로 잡겠습니다.”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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