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의 독립

千羊之皮不如一狐之腋 천양지피불여일호지액
양가죽 천 장이 여우겨드랑이가죽 한 장만 못하다 <趙世家>
직언하던 가신이 죽은 뒤 ‘예, 예’하는 사람들만 남은 것을 조 간자가 걱정하며

조 간자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다.

정나라의 고포자경이라는 관상가가 한 번은 진나라에 들렀다. 간자가 그를 초대하여 여러 아들들을 보이고 관상에 대한 평을 구했다. 자경은 한 사람씩 뜯어본 후에 “이 가운데 장군이 될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조씨 가문이 멸망한다는 말이오?” 간자가 실망해서 묻자 자경이 반문했다. “아까 길에서 한 어린애를 보았는데, 그 아이는 아들이 아니었습니까?”

아직 자경에게 보이지 않은 아이가 하나 있긴 했다.

“그렇다면 한 아이가 있긴 합니다만, 천한 적(翟)나라 계집이 낳은 자식인데 무슨 가망이 있겠소이까.” 하면서도 간자는 그 아이를 들어오게 했다. 이름은 무휼이다.

자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이를 내보낸 후에 간자에게 말했다. “이 아드님이 실로 장군감입니다. 하늘이 내려주신 인재는 비록 태생이 비천하다 해도 나중에는 기필코 존귀하게 됩니다.”

자경이 떠난 후에 간자가 모든 아들들을 불러 대화를 나누어보았더니, 그 가운데 무휼이 가장 총명하였다. 믿기지 않았던지 간자는 며칠 후 아들들을 시험했다.

“내가 귀중한 부절(寶符)을 상산에 숨겨두었다. 먼저 찾은 사람에게 그것을 상으로 주겠다.”

귀중한 부절이란 천명(天命)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것을 준다는 말은 후계자로 삼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아들들이 모두 말을 달려 상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온 산을 다 뒤져 자그만 부절 하나를 찾기란 해변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었다. 온종일 헤매다가 지쳐 돌아왔을 때 부절을 찾았다고 말하는 아들은 무휼밖에 없었다.

“그래 어디 내놓아봐라.”

간자가 말하자 무휼이 대답했다.

“상산에 올라가 건너편을 내려다보니 대(代)나라 땅이었습니다. 대나라는 능히 취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무휼이 과연 현명하며 시야가 넓다는 것을 알게 된 간자는 그 때까지 후계자였던 맏아들 백로를 페위시키고 무휼을 태자로 삼았다.

그 때 진(晉)나라는 삼진(조 한 위) 외에 지백(智伯)이 더하여 ‘4경(卿)’을 이루고 있었는데, 지백이 삼진을 누르는 힘을 과시하며 진의 조정을 좌우하였다.

지백이 정나라를 침략하여 조나라도 참전하게 되었다. 간자는 이미 나이가 많았으므로 무휼이 조군을 이끌고 참가했다. 지백은 오만한 사람이라, 젋은 무휼을 업신여기고 향응을 빙자하여 먹지로 술을 마시게 한 다음 구타까지 하였다. 무휼이 묵묵히 수모를 당했다. 수하들이 분개하여 지백을 죽이자고 청하자 무휼이 말했다. “주군께서 나를 태자로 삼으신 것은 내가 치욕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휼은 그 수모를 마음에 새겼다.

돌아와서도 지백은 간자에게 무휼을 비난하며 폐위시키라고 청했으나 간자는 듣지 않았다.

진 출공 17년에 간자가 죽자 무휼이 뒤를 이었다. 그가 조 양자(襄子)다.

뒤에 지백은 조 한 위씨들을 이끌고 범씨와 중항씨를 진압하여 땅을 나누어가졌다.

출공이 노하여 지백을 치려했는데, 사경이 오히려 출공을 공격하여 출공은 제나라로 도망가다 죽었다. 지백이 새 군주(의공)을 세웠다. 그리고는 아주 교만해져서 한씨와 위씨에게 땅을 요구하여 빼앗아가졌다. 이어서 조 양자에게도 땅을 요구했는데, 양자는 평소 원한이 있었으므로 이를 거절하였다. 지백이 한 위씨들과 함께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 양자는 진양에서 농성하면서 버텼다. 포위된지 1년이나 지나 더 이상 견디기 어렵게 되었을 때 조 양자의 재상 장맹동이 몰래 한과 위를 방문하여 의리를 호소했다. “지금 조나라가 멸망하면, 장차는 한나라와 위나라가 차례로 같은 신세가 될 것이오.” 그 말을 한과 위나라 군주가 받아들였다. 조나라가 마지막 반격에 나설 때 한과 위가 호응하여 지백을 물리치고 그의 땅을 나누어가졌다.

이로써 조한위(趙韓魏) 세 나라(삼진)은 장차 진나라의 신하 위치로부터 벗어나 천자를 직접 섬기는 독립된 제후국으로 나아갈 기틀을 확보했다.

이야기 PLUS 명의 편작(扁鵲)

조 간자가 살아있을 때, 그의 가신 중에 주사(周舍)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직간(直諫)하기를 좋아했다. 주사가 죽은 후, 간자는 매번 조회를 열어 정사를 처리할 때마다 언짢아했다.

가신들이 이를 두려워하며 용서를 구하자 간자가 말했다.

“그대들에게 죄가 있는 것은 아니오. 다만, 내가 듣기에 천 마리 양의 가죽이 여우 한 마리의 겨드랑이 가죽만 못하다고 들었습니다(吾聞 千羊之皮不如一狐之腋). 내가 대부들과 조회를 가질 때마다 모두들 공손히 ‘예, 예’하는 대답만 들리고 주사처럼 기탄없이 직언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이를 걱정하는 것이오.”

이처럼 쓴 소리 듣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조나라 사람들은 간자를 잘 따르고 복종했다.

많은 난관 속에서도 조나라가 대가 끊이지 않고 독립 왕국으로 자라난 것은, 쓴 소리를 달게 여기며 덕을 가다듬은 시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포위된 지 1년이 지나 더 이상 견디기 어렵게 되었을 때 조나라 재상 장맹동이 몰래 한(韓)과 위(魏)를 방문했다. “지금 조나라가 멸망하면, 장차 한나라와 위나라도 같은 신세가 될 것이오.”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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