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관 설명 들었다는 서명만으로 보험사 의무 다했다 볼 수 없어"

[보험매일=이흔 기자] 보험 가입자에게 서면이 아닌 CD에 약관을 담아 건넸다면, 그 안에 규정된 세부적인 면책조항을 근거로 보험금 지급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민사36부(황병하 부장판사)는 보험 가입자 A씨가 한 손해보험사를 상대로 낸 보험금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보험금 1억9천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상해보험 가입자인 A씨는 2014년 수술을 받던 중 의료사고가 발생해 일반적 거동이 불가능한 수준의 뇌 손상을 입었다.

이후 A씨는 진단서 등을 내고 보험금을 청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소송을 냈다.

 재판의 쟁점은 A씨가 입은 손해가 보험 약관의 '면책조항'에 해당하느냐였다.

해당 약관에는 '임신, 출산, 유산 또는 외과적 수술, 그 밖의 의료처치'로 인해 생긴 손해는 보상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A씨가 의료처치로 손해를 입은 만큼 이 조항에 따라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험사는 주장했다.

그러나 1·2심 재판부는 이런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보험계약을 체결할 때 설계사가 A씨에게 약관을 CD로만 전달했는데, 이것으로는 면책조항을 충분히 설명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재판부는 "약관의 분량이 상당한데 청약서를 작성할 때 설계사가 A씨에게 서면이 아닌 CD 형태로 내줬다"며 "약관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해당 면책규정에 관한 명시·설명의무를 이행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상품설명서 수령 및 교부 확인서에는 면책규정의 개략적인 내용조차 기재돼 있지 않다"며 "약관의 주요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는 문구에 A씨가 서명했다는 사실만으로 쟁점이 된 조항에 대한 설명의무가 이행됐다고 볼 수도 없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보험이 수술 과정에서 난 의료사고로 생긴 손해를 보상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인이 예상하기 어렵다"며 "해당 면책조항이 금융감독원의 표준약관에 포함됐다거나 다른 일반적 보험계약에도 널리 사용된다는 이유만으로 보험사의 설명의무가 면제된다고 볼 수도 없다"고 덧붙였다.

보험사들은 2002년 금감원이 CD에 담은 약관의 효력을 인정한 이후 경비 절감 등의 이유로 10여년간 CD나 USB 형태로 약관을 제공했다. 이를 두고 시민단체 등에서는 "가입자에게 불편을 전가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보험업계의 한 관계자는 "보험사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목소리가 많아 2013∼2014년께에는 상당수 보험사에서 CD로 약관을 제공하는 관행이 사라졌다"며 "최근에는 이메일로 약관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전했다.
 

저작권자 © 보험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