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왕 합려

將在軍 君命有所不受 장재군 군명유소불수
장수가 군중에 있을 때는 왕의 명령이라도 받들지 못할 수가 있다. (孫子吳起列傳)
손자(孫子)가 오나라 왕의 애첩들을 군령을 어긴 죄로 처형하면서

오자서(伍子胥). 간신 비무기의 모함으로 아버지와 형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후 오나라로 망명한 초나라 출신 오자서는 오왕 합려를 도와 중원을 평정하고 역사에 남는 영웅이 된다. 바야흐로 수몽임금과 연릉계자 계찰의 나라 오(吳)는 빠른 속도로 발흥(勃興)하고 있었다. 그 어떤 기운이 오자서와 같은 재능 있는 호걸들을 그 곳으로 모여들게 하고 있었다.

오자서 말고 또 누가 있었던가. 제나라 출신의 손무(孫武)라는 사람이다. 병법의 달인으로 후일 ‘손자(孫子)’라 불렸고, 그가 쓴 병법 고전 <손자병법>(孫子兵法)은 오늘날까지도 병법서 또는 처세술의 교범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손무는 제나라를 떠나 오나라에 와서 은거하면서 13편의 병법서를 쓴 뒤, 오자서의 소개로 합려왕을 만나 오나라 장군에 등용됐다.

처음 합려왕은 손자의 통솔능력을 시험해보고자 했다. “시험 삼아 그대가 군대를 지휘하는 방법을 보고 싶소. 혹시 부녀자로도 시험해볼 수 있겠소?” 손무는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왕궁 안에 있는 180명의 궁녀들이 소집되었다.

손자는 이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 왕이 총애하는 희첩 두 사람을 각각의 대장으로 삼았다. 모든 여자들에게 창을 쥐어주고는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가슴, 등, 좌, 우, 뒤라는 말을 알고 있는가?” 여자들이 “압니다”라고 대답하자 손자는 말했다. “‘앞으로’라고 하면 가슴 쪽을 보고, ‘좌로’ 하면 왼손 쪽을 보며, ‘우로’ 하면 오른손 쪽을 보아라. 또 ‘뒤로’하면 등 뒤쪽을 보아라.” 여자들이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손자는 군령을 선포했다

몇 번 더 약속된 군령을 설명한 뒤 북을 치면서 ‘우로’ ‘좌로’하고 구령을 내렸으나 여자들은 처음 해보는 놀이에 그저 키득거리면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군령이 분명한데도 따르지 않는 것은 대장들의 잘못이다. 군내에서 군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사형을 면할 수 없다.” 손자가 대장으로 삼은 왕의 두 애첩을 참수하려 하자 왕이 급히 사람을 보내 만류했다. “과인은 이미 장군의 용병술을 잘 보았소. 그 두 명의 애첩이 없으면 과인은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를 것이니 제발 죽이지는 말기를 바라오.”

그러나 손자는 “저는 이미 임금의 명을 받아 장수가 되었으며, 장수가 군중에 있을 때는 왕의 명이라도 받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將在軍 君命有所不受).”하고는 끝내 두 사람을 죽여 본을 삼았다. 그들 다음 서열의 희첩을 대장으로 세워 다시 북을 치며 구령을 내리니 궁녀들은 모두 좌로, 우로, 뒤로의 명령은 물론 앉아, 일어서 같은 구령에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감히 다른 소리를 내지 못했다.
오자서와 손무 두 사람이 모두 걸출했다. 만약 호랑이 같은 두 무인이 서로 경쟁했더라면 오나라는 오히려 풍비박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호걸들이 의기투합했으니 오나라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일찍이 중원의 패자였던 제나라 환공에게는 관중 포숙 습붕의 의기투합이 있었고, 진(秦)나라 목공에게는 백리해 건숙 유여 등 현자들의 우애가 있었다. 초나라 장왕에게는 강직한 오거 소종으로 시작하여 지혜로운 손숙오와 우맹 등이 있었으며, 진나라 문공에게는 망명시절부터 함께 풍찬노숙하며 패자의 꿈을 키운 다섯 현인들의 의기투합이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문제가 있다면 대개는 인재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합심하지 않는 게 더 큰 문제다. 영웅과 인재들을 불러들이고 합심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바로 군주라는 리더의 역량이며 운수에 달려있다.

불세출의 호걸들이 오나라에 모여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공자 광(光)의 흡인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광은 공자시절 자신에게로 찾아오는 호걸들을 빈객으로 맞아 힘을 키웠다. 그의 빈객인 오자서가 전제(專諸)를 소개해 쿠데타를 성공시킴으로써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바로 합려(闔閭)왕이다. 합려왕은 이후에도 오자서와 손무 등 인재들을 우대하여 나라의 힘을 키웠고, 이들의 용맹과 지략에 힘입어 강대국인 초나라를 정복하고 제나라와 진(晉)나라까지 제압하며 중원을 지배했다. 합려왕은 춘추오패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야기 PLUS 병법의 달인 사마양저

손무의 성씨는 손(孫)이지만 본래는 제나라의 전(田)씨였다 한다. 무인으로서 <사기 열전>에 가장 먼저 다뤄진 인물이 사마 양저인데, 그가 바로 손무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제나라 경공 때 진(晉)나라와 연(燕)나라가 잇달아 국경을 침범해왔다. 제나라 군은 연거푸 패하여 막아내지 못하므로 경공이 심히 근심하였는데, 재상 안영이 한 사람을 천거했다.
“전씨 문중에 뛰어난 사내가 하나 있는데, 출신이 서자(庶子)여서 쓰이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능히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오니 시험해 보십시오.”

과연 병사에 관한 일에 막힘이 없는 사람이었다. 경공이 전양저를 장군으로 삼고 장고라는 대부를 감군(監軍)으로 삼아 출정을 명했다. 귀족인 장고는 친족들이 베푼 송별연에서 밤새 술을 마시고 다음날 오후에야 군문에 나타났다. 양저가 군법을 내세워 장고의 목을 베니 전군의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군율을 바로 세운 뒤에 사졸들을 자상히 보살피며 출정하니 병사들의 사기가 충천했다. 이 소식을 듣고 진나라와 연나라의 침략군은 양저의 군대가 나타나기도 전에 철수해버렸다. 이 승리로 양저는 제나라의 대사마가 되었다. 그러나 사마양저는 뒤에 귀족 대부들의 잇단 모함으로 파면된 후에 죽었다. 뒤에 <사마양저 병법>이 남았는데, 사마천은 ‘그 내용이 방대하고 심원하여 삼대 제왕들의 전쟁에서도 다 써먹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했다.

“제발 그들을 죽이지는 말아 주시오.”
왕이 급히 전갈했으나 손자는 끝내 왕의 애첩들을 처형했다.
다시 북을 치며 구령을 내리니 궁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감히 다른 소리를 내지 못했다.

 

▲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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