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초나라

余殺人之子多矣 能無及此 여살인지자다의 능무급차

내가 남의 자식을 많이 죽게 했으니, 이런 일을 피할 수 있겠는가 <楚世家>

초 영왕이 전쟁터에 머물다가 자기 아들이 도성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초나라는 즉위 후 3년간 ‘울지 않는 새’가 되었다가 변신하여 중원을 지배했던 장왕의 치세 이후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제후국이 됐다. 그러나 외부에 맞설 적이 없으면 분란은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법이다.

장왕과 공왕 강왕이 차례로 나라를 다스린 세월이 거의 70년이었다. 강왕이 죽은 뒤 아들 겹오가 왕좌에 올랐는데, 4년 뒤에 강왕의 형제인 자위가 조카이자 왕인 겹오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 강왕의 동생들은 자위 자비 자석 기질 등이 있었다.

본래 겹오는 삼촌인 자위를 영윤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는데, 위가 정나라에 사신으로 가다가 돌아와 병석에 누운 조카를 살펴보는 척하며 목 졸라 죽여버렸다. 그리고는 겹오의 두 아들까지 죽였다. 쿠데타였다. 자위의 동생 자비가 진(晉)으로 피신한 뒤 자위는 왕위에 올랐다. 영왕(靈王)이다.

영왕은 성격이 급하고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사치하는데다 전쟁과 토목공사 벌이기를 좋아했다. 왕이 된지 3년 만에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합을 가졌는데, 여기에 정(鄭)나라에서는 대부 자산이 참석했고, 진(晉)과 송(宋) 노(魯) 위(衛)나라는 참가하지 않았다. 영왕은 힘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먼저 오나라에 쳐들어갔다. 오나라 주방이라는 곳에 경봉이 있었다. 제나라에서 최저 가문을 몰살한 뒤 권력을 전횡하다가 아들과 전씨(田氏) 등에게 쫓겨나 오나라로 온 망명객 경봉이다. 영왕이 군주의 권위를 과시하려고 경봉을 체포해서는 등에 도끼를 매게 한 뒤 이렇게 외치도록 강요하였다. “제나라 경봉을 본받지 마시오. 자기 국왕을 죽이고 어린 군주를 속이고 대부들을 위협하여 자기를 지지하게 한 사람이오.”

그러나 경봉은 도끼를 매고 걸으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초나라 공왕의 서자 위를 본받지 마시오. 자기 국왕인 형의 아들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된 자요.” 옳고 그른 이치로 보자면, 경봉이 비록 죄가 있다 하나 영왕이야말로 그 죄를 문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영왕은 당황하여 어서 경봉의 목을 베라고 소리쳤다.

이듬해 영왕은 제후들의 회합을 주도하려고 유랑민들을 잡아다가 큰 누각을 짓게 했다.
또 막내동생인 기질(棄疾)에게 군사를 주어 진(陳)을 점령케 하고 채나라 제후를 불러들여 술을 잔뜩 먹인 뒤 살해하고는, 기질을 진채공(陳蔡公)으로 임명하여 진과 채의 영토를 다스리게 했다. 그 다음에는 서(徐)나라를 평정하고 오나라를 넘봤다. 그러면서 측근들에게 주(周)천자의 솥이라도 가져오고 싶다고 말했다. 오만이 하늘을 찔렀다.

장차 오나라를 공격하려고 1천승(말이 끄는 무자수레의 숫자로, 1승마다 갑사와 보졸 75명이 딸려 있다. 1천승이면 병력 숫자는 7만5천 명이다)이나 되는 국경지역인 간계에 머물렀는데, 해가 바뀌도록 도성으로 돌아가지 않다가 일이 터졌다.

일찍이 진(晉)으로 망명했던 동생 비가 돌아와 영왕의 태자를 죽이고 스스로 왕좌를 차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간계에 있던 영왕의 군사들 사이에 소문을 퍼트려 ‘나라에 새 왕이 들어섰으니 바로 돌아오는 사람에게는 기존의 관직과 재산을 유지시켜 주겠지만 늦게 돌아오는 사람은 귀양을 보낼 것이다’라고 하니 군사들이 앞 다투어 영도로 돌아가버렸다.

먼저 태자가 살해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영왕은 마차 아래로 쓰러졌다. “자식을 잃는 슬픔이 이렇단 말인가. 그동안 남의 자식들을 수 없이 죽게 했으니 이런 일을 당하는 건 당연하다(余殺人之子多矣, 能無及此乎).” 왕은 투항하거나 피신할 생각이 없었다.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할 자신의 업으로 여겼다. 시종과 좌우 관원들마저 고향으로 떠나간 뒤 홀로 숲속을 헤매다가 쓰러졌다. 예전에 그의 은덕을 입은 한 지방관의 아들이 그를 찾아내 집으로 모셨으나 영왕은 얼마 뒤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

이야기 PLUS

영왕을 무너뜨린 핵심 인물은 사실은 공자인 비가 아니었다.
영왕이 채를 점령했을 때 그곳 대부인 관기라는 사람을 처형했는데, 그 아들 관종(觀從)이 오나라로 도망쳐 보복을 계획했다. 관종은 오나라 왕에게 초나라를 공격할 기회라고 설득하고 영왕에게 굴복한 적이 있는 월나라 대부 상수과에게 접근하여 영왕에게 대항하도록 부추겼다. 그리고 자신은 오나라의 첩자가 되어 진(晉)에 가있던 자비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한편 진채공 기질은 영왕의 신하가 되긴 하였지만 내심 반감을 품고 있었다. 마침 진(陳)과 채 땅을 다스리게 된 기회를 이용하여, 영왕에게 정복당한 두 나라 사람들을 심복으로 삼고 오나라 월나라와도 관계를 맺었다. 관종이 그 사이를 오간 것은 물론이다. 그들은 오나라 월나라의 군사를 빌어 함께 초나라 영도를 기습하고는 영왕의 태자 녹을 죽였다. 비가 왕이 되고 기질은 사마가 되기로 했다. 영왕과 함께 간계에 있던 관원과 군사들에게 왕을 버리고 귀국하도록 소문을 퍼뜨린 것도 관종의 계책이었다. 그의 목숨 건 줄타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영왕은 경봉을 결박한 뒤 “자기 왕을 죽이고 대부들을 위협한 제나라 경봉을 본받지 마시오”라고 소리치게 했다. 경봉은 “형의 아들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된 초나라 공왕의 서자를 본받지 마시오”라고 소리쳤다.

▲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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