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망스런 노 소공(昭公)

不度之人 鮮不爲患 부도지인 선불위환
법도를 모르는 사람이 근심거리가 되지 않는 일은 없다 (<左傳> 소공 원년)
노 양공의 후계를 정할 때 경망스런 사람을 옹립해서는 안 된다며 대부 목숙이

공자가 열 살 무렵 노나라에서는 양공이 죽었다. 뒤이어 즉위한 태자 또한 석 달 만에 죽었으므로 서자인 주(椆)가 뒤를 이었다. 소공이다.

후계를 정할 때 주의 나이는 19세였는데 언행이 경망스러워 대부들이 근심했다.
“태자가 죽고 다른 적자도 없을 때는 서얼 가운데서 옹립해야 하는데, 지금 주는 너무 경박하니 적절하지 않습니다. 국상 중에도 애도하지 않고 희희낙락하더이다. 법도가 없는 사람은 근심거리가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문 법(不度之人 鮮不爲患). 반드시 장차 화근이 될 것이오. 장례식 중에도 세 번이나 옷을 갈아입으면서 거울만 보았소.”
대부 목숙이 이의를 제기했으나 계무자는 말을 듣지 않고 주를 옹립했다. 선비들이 “주는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과연 소공은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초 영왕이 주도하는 회맹에 병을 핑계대고 가지 않았으며, 그로부터 4년이 지나 또 한 번 초청을 받자 선물을 가져갔다가 속임수를 써서 되가져오기도 했다. 4년 뒤에는 진(晉)나라를 방문하려고 출발했는데, 진나라 군주가 거절하여 중도에 돌아오기도 했다. 주변 국가들에 신뢰를 얻지 못하여 인심을 잃은 것이다. 진나라는 노 소공을 몇 차례나 무시했다.

즉위 25년째. 소공의 나이는 45세였다. 대부들이 즐기는 오락은 닭싸움이었는데, 어느날 계(季)씨와 후(郈)씨의 닭싸움이 가문 사이의 싸움으로 번졌다. 계씨는 닭의 날개에 후추가루를 묻혀두어 상대 닭이 눈을 뜨지 못하게 만들었고 후씨는 닭 발톱에 쇠갈고리를 끼웠다. 계평자와 후소백이 심히 다투고 헤어졌다.

며칠 뒤에는 장(藏)씨 집안사람이 형제간에 다투고는 계씨 집안에 와서 숨었는데, 대부 장소백이 보복으로 계씨 집안사람을 붙잡아 가두니 계씨가 다시 장소백의 수하를 가두었다.
계평자에게 원한을 가진 후소백과 장소백이 씩씩거리며 군주인 소공에게 달려가 하소연하였다. 이미 나라의 실권이 계씨와 맹씨 숙손씨 세 가문의 손에 들어가있는 터에, 신중한 군주라면 가만히 계평자를 불러 화해를 종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공은 제후의 권위를 내세워 계평자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갔다. 계평자가 거리를 두고 외쳐 말했다. “주군께서는 일방적인 모함을 들으시고 저를 징벌하시려는 것입니까. 정 그러시다면 저를 남쪽 변방인 기수로 추방해주십시오. 조용히 떠나겠습니다.” 그러나 소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수레 다섯 대만 이끌고 다른 나라로 가겠습니다.” 그래도 거절했다.

소공 편에 서있던 대부 자가구가 보다못해 조언했다. “허락하십시오. 정권이 계씨 손에 있는지 오래입니다. 그의 사람들이 많으니 끝까지 정벌을 고집하는 것은 이롭지 않습니다.” 잠시 흔들리는 소공의 표정을 보고 후소백이 다시 충동질했다.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그는 불충한 사람입니다.”

상황을 보고 있던 숙손가(家)의 가신들이 따로 둘러서서 상의했다.
“우리들에게는 계씨가 있는 게 나을까 없는 게 나을까.” “계씨가 없으면 숙손씨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숙손의 병사들이 제후 공실의 군대를 공격하니 계씨의 군사들이 협공했다. 소공이 긴급히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후소백을 맹씨에게 보냈으나 맹씨 또한 제후보다는 삼환의 의리를 중시했다. 후소백을 잡아 가두고 군사를 몰아 소공을 공격하니 소공은 달아나야 했다.

이야기 PLUS

노 소공은 어리석은 군주의 전형이다. 오죽하면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자기 명령을 따르는 대부들 사이에 권력구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 그 무렵 노나라가 삼환(三桓)의 손에 장악돼 있다는 것은 나라밖에서도 다 아는 사실이었는데 정작 군주인 소공만 몰랐던 모양이다. 아니라면 평소 삼환에게 억눌린 기분을 정벌로 되갚아주려 했던 것인가. 만일 그랬다면 준비라도 철저해야 했을 것이다.

후씨와 장씨 같은 미약한 대부들의 결의만 믿고 아무 준비도 없이 쳐들어가 계씨를 죽이려 한 것은 첫 번째 실수였다. 계씨가 스스로 굴복여 유배를 떠나거나 망명하겠다고 제의하는 것을 허락지 않은 것은 맹수를 달아날 구멍도 주지 않고 몰아댄 격이니 마침내 목숨을 걸고 반항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두 번째 실수다. 다음으로 숙손의 군사들이 계씨 편을 들어 공격할 때 또 다른 삼환인 맹씨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니 이빨을 드러내고 발톱을 얻은 적의 어깨에 날개까지 달아준 격이 아닌가. 이것은 세 번째 실수였다.

군주의 자리에 앉았다 해서 천하가 다 자기 명령에 굴복하는 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군주보다 강한 신하가 얼마든지 있고, 그런 신하가 몇이나 있을 수도 있다. 노나라는 더욱 그런 상태였다. 군주는 그들을 때로는 명령하고 때로는 구슬러 자신의 뜻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여 존경을 받지 못하면 군주의 권위는 더 한층 취약해진다. 즉위 때부터 대부들의 조롱거리였던 소공은 함부로 칼을 휘두르려다 되레 대부들에게 쫓겨나 제와 진(晉)나라의 보호를 받다가 끝내 귀국도 못하고 죽었다.

계평자의 호소를 무시하는 소공에게 자가구가 충고했다.
“정권이 계씨 손에 있는지 오래입니다.
그의 사람들이 많은데 끝까지 정벌을 고집하시면
장차 반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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