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三晋)의 호걸들 1

一人殿之 可以集事 일인전지 가이집사
(대장) 한 사람이 동요하지 않으면 힘을 모아 이길 수 있다. (<左傳>성공2년)
제나라를 맞아 싸우던 극극이 화살에 맞자, 장후가 동요하지 말라고 충고하며

순서는 좀 엇갈리겠지만, 후일 진(晉)나라를 셋으로 나눠 갖게 되는 삼진(三晋)의 창업자들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지금쯤 삼진이 제후국의 기틀을 다지면서 춘추전국시대의 새로운 주인공들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삼진은 곧 조(趙) 위(魏) 한(韓), 세 나라를 말하는데, 본래 진나라의 대부들의 후예다. 그들은 진 문공 중이가 중원을 떠돌며 부활을 모색할 때 그를 받들고 함께 풍찬노숙한 공신의 후예들이란 공통점이 있다.

세 대부들이 명문가로 발돋움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대략 진 경공 때라 할 수 있다.

아버지 성공 때로 시작하여 경공 때까지 진나라는 초(楚) 제(齊) 진(秦) 등과 잇달아 전쟁을 치렀다. 이 때 조삭(趙朔)과 한궐(韓厥)은 순임보, 난서 등과 함께 극극(郤克)이 이끄는 기병대에 출정하여 전공을 세웠고, 이후 경공 12년 전국을 6군 체제로 개편할 때에 6경이 되어 권력의 기반을 잡았던 것이다.

조삭의 가문은 ‘도안고의 난’에서 살아남은 조무로 인해 기틀이 확고해졌다. 위씨와 한씨의 경우는 어떤 두드러진 공이 있었을까. 잠시 그 일화를 살피기로 한다.

때는 경공 10년(BC 588년)이다.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했는데, 이로 인해 동맹국인 위(衛)와 진(晉)이 제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게 됐다.

진나라는 제나라와의 전쟁에 적극적이었다. 당시 진나라의 재상은 극극이었는데, 극극은 제나라에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 늘 보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극극이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제나라 경공은 자기 어머니에게 그 모습을 엿보게 했다. 극극은 곱사등이였는데, 여자가 숨어서 엿보다가 그만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극극은 대노하여 “반드시 제나라에 보복하겠다”고 맹세하고 이를 갈았던 것이다.

극극의 군대는 8백량의 전차를 가지고 제나라군을 막아섰다. 제나라는 노나라의 용읍을 유린하고 안(鞍)이라는 곳에서 극극의 군사들과 마주쳤다. 전차를 몰고 돌격할 때 극극은 화살을 맞고 주춤했다. 아직 북을 치면서 고통을 호소하자 함께 돌격하고 있던 장후가 말하기를 “나는 전투가 시작될 때 화살이 손바닥을 뚫었지만 그것을 뽑을 사이도 없이 말을 몰고 있습니다. 당신도 참으십시오.”라고 말했다. 장후가 또 말했다. “군사들의 눈과 귀는 오직 원수의 깃발과 북소리를 따라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합니다. 원수 한 사람이 동요하지 않는다면 힘을 모아 이길 수 있는 것이오(一人殿之 可以集事). 출정이란 본래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아직 죽은 것은 아니니 힘을 내십시오.”

극극은 아픔을 참고 전진했으며, 진군은 제나라 군을 대파했다.

싸움이 한창일 때 한궐은 제 경공의 전차와 마주쳤다. 경공의 전차는 나무뿌리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다가 적장 한궐에게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한궐이 경공의 전차를 탈취하여 자기 진영으로 돌아왔으나, 전차에 탄 사람은 경공이 아니었다. 그는 경공의 마차 오른쪽을 맡는 호위무사로 봉추보라 하는 사람이었는데, 마차가 꼼짝도 못하게 되었을 때 얼른 가운데 있던 경공과 자리를 바꾸었다. 한궐의 군사들이 포위했을 때 봉추보는 제후인 척하면서 마부의 자리에 서있던 경공에게 “얼른 내려가 마실 물을 좀 떠오라”했고, 경공은 그 길로 달아나 위기를 면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4년 뒤 진의 위과가 세운 전공은 <춘추 좌씨전>에 수록되어 있다. BC 584년이다. 섬진(秦)의 환공이 진(晉)을 공격하러 와서 차우보씨의 땅에 머물렀다. 당진의 경공은 그때 적(狄)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돌아오던 중이었는데, 위과를 시켜 섬진을 공격하게 하니 위과가 섬진의 장사인 두회를 사로잡아 그들을 격퇴했다.

이야기 PLUS

위과의 전공과 관련하여 하나의 유명한 일화가 전해온다.

예전에 위과의 아버지 위 무자에게 아들 없는 어린 첩이 있었다. 그런데 무자가 늙어 병들게 되자 아들 과를 불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아직 나이가 어리니, 내가 죽으면 반드시 다른 곳에 시집을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병이 점점 중해져서 정신이 혼미해진 중에 무자는 애첩에 대해 “반드시 함께 묻어 달라”고 말을 바꾸었다.

아버지가 죽자 과는 그 여자를 같이 묻지 않고 다른 사람을 물색하여 시집보냈다.

과는 “사람이 위독하게 되면 마음이 혼란해지는 법이다. 나는 아버지가 올바른 정신일 때 한 말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보씨 땅에서 싸울 때 위과는 꿈에 어떤 노인이 전쟁터에서 바닥에 난 풀을 묶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음날 전투에서 위과는 가장 어려운 적이던 두회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두회가 아군에게 달려들다가 넘어졌기 때문이다. 두회는 땅에 있는 풀들이 서로 묶여 있어 발부리가 걸렸던 것이다.

전공을 세웠으나 기이하게 여기던 위과의 꿈에 그 노인이 다시 나타나 말했다.

“나는 장군이 시집을 보내준 여자의 아버지입니다. 장군께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올바른 정신일 때 남긴 유언을 따라 딸의 목숨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보답한 것입니다.”

기담이지만, (죽은 사람이) 풀을 묶어 은혜를 갚았다 해서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고사와 함께 전해오는 얘기다.

위(魏) 무자에게 어린 첩이 있었다. 무자가 늙어 병들자 아들 과를 불러 “반드시 시집을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병이 중해지자 “반드시 함께 묻어라”고 말을 바꾸었다.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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