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나라의 태동

有恩於此故復於彼 부유은어차고복어피
이쪽에서 베푼 은혜는 다른 곳에서 보상을 받기도 한다. <說苑>
晉에서 趙盾의 가문이 화를 당했을 대 식객들이 유복자를 구하여 은혜를 갚음

일찍이 조돈이 살아있을 때, 꿈속에 가문의 시조인 숙대가 나타났다. 숙대는 점치는 거북을 껴안고 슬피 울다가 잠시 뒤 손뼉을 치며 웃고 노래를 불렀다. 이상히 여겨 점을 쳐보니 거북껍질의 균열이 벌어졌다가 다시 붙었다. 사관이 해석하기를 “흉몽입니다. 당신의 아들 대에 이르러 가문이 크게 쇠락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진(晉) 경공의 사구 도안고(屠岸賈)가 난을 일으켜 조(趙)씨 일가를 멸족시키려 할 때 대부 한궐(韓厥)은 급히 조삭(趙朔)에게 찾아가 우선 달아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관군의 감시를 뚫고 달아나 숨기란 여의치 않았다. 더구나 신혼인 조삭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조삭은 달아나기를 포기하면서 한궐에게 부탁했다. “우리 가문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만 도와주기를 바라오. 그대가 약속해준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소”하고 말했다. 한궐은 이를 승낙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병을 핑계대고 틀어박혔다.

마침내 도안고는 군주의 승낙이 떨어지기도 전에 군사들을 동원하여 조씨 일가를 잡아들였다. 죽은 사람이 3백명이나 됐다는 기록도 있으니 가히 ‘일망타진’이다.

그러나 완전히 씨를 말리지는 못했다.

조삭의 아내는 군주 경공의 친누이였으므로 궁으로 들어가 몸을 피했다. 아무리 군주를 능욕할만한 권세를 지닌 도안고라 해도 차마 궁을 습격해 죽일 수는 없었다. 대신 그녀가 아들을 낳으면 죽이려고 별렀다.

조씨의 식객 중에 공손저구와 정영이란 사람이 있었다. 공손저구가 정영에게 “왜 그대는 같이 죽지 않는가.”하고 물으니 정영은 “조삭의 부인 공주가 지금 임신 중인데, 다행히 아들을 낳으면 내가 부양하고 딸을 낳는다면 그때 죽겠다.”라고 대답했다.

얼마 뒤에 공주는 아들을 낳았다. 도안고가 소식을 듣고 궁중을 수색했는데, 공주는 갓난아기를 속바지 가랑이 안에 감추고서 “조씨 가문이 멸망하려면 네가 울고, 다행히 멸망하지 않으려면 아무 소리도 내지 마라”하며 기도했다. 다행히 아기는 울지 않았다.

당장의 위험은 벗어났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공손저구가 정영에게 급히 상의하며 “고아를 부양하는 일과 죽는 일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어렵겠는가.”하고 물었다. 정영이 “죽는 일이 차라리 쉬울 것이다”라고 답하자 공손저구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어려운 일을 맡아주게. 나는 쉬운 일을 맡아 먼저 죽겠네.”

상의 끝에 공손저구는 다른 아기를 하나 구해서 등에 업고 산으로 들어가 숨었다. 정영이 장수들을 찾아가 공손저구가 조삭의 아들을 감추어 기르고 있다고 고발했다. 도안고가 곧 공손저구를 찾아내 아기와 함께 죽여버렸다. 조삭의 아들은 이제 죽은 것으로 되었으므로 정영은 조씨 고아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 안심하고 기를 수 있었다. 죽은 아기가 마침 같은 시기에 태어난 정영의 친아들이었다는 설도 있다.

15년이 흘렀다. 경공이 병들어 점을 쳐보니 ‘대업(大業)의 후대가 순조롭지 못하여 재앙이 생긴 것’이라는 풀이가 나왔다. 경공이 대부 한궐을 불러 그 뜻을 물으니 한궐이 대답했다. “대업이란, 진(晉)나라 선군 문후를 도와 나라를 일으키고 부왕 성공(成公)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공을 세운 대부의 가문을 말합니다. 이들은 잠시라도 후대의 제사가 끊어진 적이 없었는데, 이제 후대가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은 바로 조(趙)씨가 멸족 당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주군의 때에 그렇게 되었으니, 백성들이 슬퍼하여 점괘에 나타난 것입니다.”

경공이 그제야 안타까워 물었다.

“내가 바란 바도 아니었소. 이제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려면 어찌해야 좋겠소.”

한궐은 “주군께서 하시기에 달렸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비로소 조삭의 유복자가 아직 살아있음을 고했다. 경공은 한궐을 따르는 대부와 중신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장수들을 불러들였다. 그 자리에 청년이 된 조삭의 아들이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조무(趙武)다. 장수들이 일제히 ‘도안고가 군주의 명령이라 속이는 바람에 따랐을 뿐, 조씨 가문을 회복하는 것은 저희도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몰려가 늙은 도안고를 체포하고 가문을 멸족시켰다. 이로써 대부 조씨의 문중은 명예를 되찾고 부활하여 조(趙)나라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야기 PLUS

진(晉)나라에서는 경공 이후 제후국 안에 하위 제후국 형태의 세 나라가 등장하게 된다. 바로 조(趙) 위(魏) 한(韓)이며, 이 세 나라를 삼진(三晋)이라 부른다. 나라 이름은 각 제후의 성을 딴 것이다. 이들의 작위는 공(公)보다 세 단계 아래인 자(子)작에서 출발했다. 세 가문은 진 문공의 공자시절부터 진나라의 핵심 대부로서 서로 협력했으며, 시간이 가면서 진나라와 대등한 제후국으로 독립하였다. 창업 후 3백년이 되기 전에 다른 제후국의 유행을 따라 각기 왕(王)이란 명칭을 쓰면서 주요 제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진(晉)나라는 오히려 일찌감치 멸망하였으나, 삼진은 그 후로도 100년 이상을 더 존속하였다.

조나라의 시조는 조무(문자)로부터 3세대를 거슬러 올라간 진 문공 때의 중신 조최(成子)로 친다. 조씨 가문의 복원을 돕겠다는 약속을 지킨 한궐은 한나라의 3세대 중시조가 되었다. 위나라의 시조 역시 진 문공 시기에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정영과 공손저구는 조돈과 삭에게서 은혜를 입었으나 그 자손을 지키는 것으로 보답했다. 때문에 후대의 한(漢)나라 학자 유향은 <설원(說苑)> ‘보은’편에 이 일을 기록하면서 말했다. ‘무릇 은혜란 베풀기는 이곳에서 해도 보답은 다른 곳에서 나타날 수 있다(夫有恩於此故復於彼)’.

공주는 갓난아기를 속바지 가랑이 안에 감추고서 “조씨 가문이 멸망하려면 네가 울고, 다행히 망하지 않으려면 아무 소리도 내지 마라”하며 기도했다.

정해용 시인

저작권자 © 보험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