晉 경공-도안고의 난

書法不隱 爲法受惡 書法不隱 爲法受惡
(사관은) 법에 따라 숨김없이 적고 (대부는) 법을 위해 오명을 감수하다 <晉世家>
기록의 원칙을 굽히지 않은 사관과 이를 존중한 대부 모두 훌륭했다는 孔子의 평

재상 조돈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탈출한 진(晉)나라에서는 기어코 정변이 있었다.

조돈이 영공의 자객들을 피해 달아난 직후 조돈의 아우 조천은 곧바로 가신들을 이끌고 달려가서 영공을 죽였다. 조돈은 아직 국경을 넘기 전에 형제들이 거사에 성공했다는 전갈을 받고 돌아왔다. 영공은 군주로서 사치하고 문란했기 때문에 백성의 미움을 받았고, 조돈은 충신의 후예로써 그 자신 또한 인품과 지혜로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영공이 조돈을 살해하려다 도리어 시해되자 이를 오히려 기뻐하는 백성이 많았다.

영공이 아직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대부들은 상의하여 주(周)나라에 가있던 공자 흑둔을 모셔다 군주의 자리를 잇게 했다. 그가 성공(成公)이다. 흑둔은 선왕인 양공의 동생이다. 본래 양공이 죽었을 때 대부들은 그의 동생들 가운데서 후계자를 구하려 했었다. 그러나 양공의 처가 눈물로 시위를 벌여 그의 어린 아들을 군주로 세워 영공이 되었던 것인데, 어린 군주가 실정하여 살해되자 그 후계는 자연스럽게 양공의 동생에게로 돌아갔으니, 역사는 십수년 전 원점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성공은 문공의 작은 아들로서 그 모친이 주 왕실의 딸이었으므로 곧 주 천자의 외손자다. 진나라 군주가 된 그 해에 조돈 일가는 천자의 승인아래 공족대부(公族大夫)의 지위를 얻었다. 주나라가 인정하는 제후가 된 것이다.

그런데 조돈 조천 일가의 거사와 관련하여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로 영공 때에 입신하여 이득을 보던 자들인데, 거사 당시에는 자신들도 해를 당할까봐 숨을 죽이고 있으면서도 이 사건을 ‘신하가 군주를 시해한 사건’으로 규정하려 했다.

진나라의 사관(太史)인 동호가 역사 초록에 “조돈이 그의 주군을 시해하였다”라고 써서 중신들에게 보여주었다. 조돈이 “군주를 시해한 것은 조천이며, 나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며 고칠 것을 요구했으나 동호는 꿋꿋이 버텼다. “당신은 가장 높은 대신인데, 군주의 위협을 받아 도주했다고는 하나, 국경 밖으로 나간 것도 아니었소. 당신이 아직 나라 안에 있을 때 군주가 시해되었는데,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시해한 사람을 처벌하지도 않았으니 당신에게 이 책임이 있지 않다면 누구에게 있단 말이오.”

조돈 일가가 군주 시해를 주도한 사건의 후유증은 그로부터 10년 후에 변란으로 이어졌다.

성공이 죽고 그의 아들 경공이 즉위한지 3년째 되는 해였다. 그 사이에 진나라는 섬진(秦)과 전쟁을 치렀고,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자 구원하러 간 일이 있었다. 경공이 즉위하던 해에는 초나라가 진(陳)을 쳐서 하징서를 징벌하는 등 안팎으로 사건이 많았다. 마침 조돈이 이 무렵에 죽고 아들 조삭(趙朔)이 대부의 지위를 이었다. 삭은 성공의 사위였다.

이런 와중에 도안고(屠岸賈)라는 사람이 사구(司寇, 형법을 관장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도안고는 백성에게 미움 받아 죽은 영공에게 등용되었던 사람인데, 용케 몸을 보전하여 살아남았다가 이 전란의 와중에 사법권을 쥐게 된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벼르던 보복을 실행에 옮겼다. 군주가 초나라와의 전쟁으로 분주한 틈을 타, 10년 전 영공이 시해된 사건을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죽은 조돈을 역모자로 규정하고는 그 일족을 주멸한다고 판결했다.

영향력 있는 대부인 한궐(韓厥)이 도안고와 그 추종자들을 제지하고 나섰다.

“조돈은 이미 선군에 의해 무죄가 되었고 공족대부가 되는 상까지 받았습니다. 선군의 뜻에 반하여 공신의 일족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난(亂)을 일으키겠다는 것이오. 더구나 군주가 분주하신 틈을 타 허락도 받지 않고 중요한 법집행을 한다는 것은 군주를 무시한 처사요.”

그러나 도안고는 오랫동안 이 일을 별렀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판결과 처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경공의 재가가 나기도 전에 멋대로 군대를 동원하여 조씨 일가를 도륙하여 그 대(代)를 끊어버렸다.

후대의 일부 사가들은 이 사건을 ‘도안고의 난’이라고 부른다. 군주의 재가를 받지 않고 권력을 남용해 저지른 전형적인 사화(士禍)였기 때문이다.

이야기 PLUS

역사에 기록을 남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사관 동호가 영공의 죽음에 조돈의 책임이 있다고 기술한 것은 시간이 흐른 뒤 새삼 그 책임을 묻는 데에도 중요한 근거로 동원되었을 것이다. 이런 기록을 고집한 동호가 일찍이 죽은 영공이나 도안고 일파에게 우호적인 감정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훗날 공자(孔子)는 <춘추>에 이 일을 기술하면서 이렇게 평가했다. “동호는 훌륭한 사가였다. 법을 원칙에 따라 진실을 감추지 않았다. 조돈 또한 훌륭한 대부였다. 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오명을 달게 감수했다. 아쉽도다. 그 순간 국경을 벗어나 있기만 했더라도 오명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관 동호에 대하여. 그저 사실을 원칙에 충실하게 기록한 ‘객관자’였다고 평한 셈이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역사 기록을 놓고 종종 맞네 그르네 논전을 펴는 것은, 역사가 조만간 현실 정치에 끌어내 이용할 수 있는 중요한 무기일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자기 후손들에게 미칠 영향을 염려하여 왕조의 실록을 지우고 찢고 뜯어고치는 권력자들도 적지 않았다. 오죽하면 임진왜란이 있던 시기에 기록된 선조실록에는 충무공의 공적이 거의 삭제되고 난신적자들이 스스로를 변명하거나 미화한 기록들이 난무한다. 스스로 좋은 정치를 하여 좋은 기록이 남게 하지는 못하면서 객관적인 사적(史籍)을 뜯어고쳐 후손을 속이려는 위선자들이 늘어나면 기록이 문란해진다. 그러고서야 어찌 나라가 위태롭지 않겠는가.

조돈이 사관에게 “나는 죄가 없다.”며 초록을 고치도록 요구했다. 사관은 “당신은 가장 높은 대신인데, 시해한 사람을 처벌하지 않았으니 당신이 아니면 누구 책임이란 말이오.”

정해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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