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목공- 천리의 땅을 얻다

一國之政 猶一身之治 일국지정 유일신지치
나라 다스리는 일을 한 몸을 다스리듯 하다 (<左傳> 문공6년)
진 목공이 ‘법이 없는 나라는 어떻게 다스리는가’ 묻자 서융의 사신이 대답한 말

춘추시대에 진(秦)나라는 아직 중국 서쪽 변방에 있어서 이민족과의 접촉이 많았다. 그들은 주로 유목민이며, 문자문명과는 거리가 먼 야만족이었다. 중원의 제후국들은 이들의 무지함을 얕보아서 ‘오랑캐’라 부르며 상대하지 않았다.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는 명칭이 모두 중국의 사방에 떨어져 사는 이민족을 부르는 명칭이다. 그러나 이들이 제후국들에 비해 반드시 약한 것만은 아니어서, 먹고살기 어려워지면 제후국을 침범해 식량을 약탈해가곤 했으므로 항시 경계 대상이었다.

진 목공(穆公) 때, 서융의 왕이 진나라를 탐색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융족의 사신은 유여(由余)라는 사람으로, 예전에 당진(晉)에서 탈출한 귀족의 자손이었다. 그는 당진의 문자를 알고 현명하여 서융의 왕이 의지하는 성인이었다.

목공이 유여를 손수 안내하여 호화로운 궁실과 쌓아놓은 재물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유여가 말하기를 “이러한 궁실과 재물은 귀신에게 만들어내라 해도 힘들 일인데, 하물며 사람들에게 이것을 만들게 했을 터이니 백성들은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使鬼為之則勞神矣 使人為之亦苦民矣).”라고 했다. 뜻밖의 대답에 당황한 목공이 질문을 던졌다.

“중원의 나라들은 시 서 예 악과 법률을 가지고 백성을 다스리는데도 항시 문제가 생기고 난리가 자주 일어납니다. 그런데 융족에게는 이러한 것마저 없으니 대체 어떻게 다스릴 수 있습니까?”

유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중원에서 난리가 끊이지 않는 것은 오히려 그 때문이 아닐까요. 상고시대 성인과 황제께서는 예악과 법도를 만드신 후에 친히 솔선수범하여 지켰기 때문에 겨우 나라가 다스려졌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왕과 제후들은 날로 교만하고 음악의 쾌락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법의 위력으로 백성을 누르고 문책하니, 아래 있는 백성들은 너무 힘들어서 군주를 원망하며 인의(仁義)를 요구하게 됩니다. 위아래가 서로 다투고 원망하며, 서로 찬탈하고 죽이되 멸족의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 모두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융족은 그렇지 않습니다. 윗사람은 그저 순박한 덕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고 아랫사람들은 충성으로 윗사람을 받드니, 한 나라의 정치가 사람이 자기 한 몸을 다스리는 것처럼(一國之政猶一身之治) 원활합니다. 그러나 잘 다스려지는 원인이 무엇인지 굳이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인의 다스림일 겁니다.”

법과 제도를 발전시켜 국력을 강화해온 군주로서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을 것이다.

유여를 객사로 배웅한 뒤 목공은 신하인 왕료에게 말했다.

“이웃나라에 성인이 있으면 이기기가 어렵다(鄰國有聖人 敵國之憂也)고 하는데, 지금 유여를 만나보니 융족에게도 현자가 있었소. 장차 어찌하면 좋겠소.”

내사가 대답했다.

“서융의 왕은 궁벽한 데 살고 있으니, 중원의 음악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왕께서 시험 삼아 가무에 뛰어난 기녀와 악사들을 보내 그의 의지를 상실케 하십시오. 또 유여로 하여금 이곳에 더 머물러 있도록 융왕에게 청하시면, 그들의 군신관계는 점차 멀어질 것입니다. 유여가 돌아가지 못하도록 오래 머물게 하여 돌아갈 시기를 놓치게 되면 융왕은 유여를 의심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돌려보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악사와 기녀들을 보내서 융왕이 좋아한다면 필시 융족의 정치는 태만해질 것입니다.”

목공이 16명의 가무기녀들을 융나라에 보냈다. 융왕은 무척 기뻐하며 음주가무에 빠져 그 해가 다 가도록 움직일 줄 몰랐다. 본래 유목민인 융족은 계절 따라 이동하면서 목축을 해야 한다. <한비자>는 이때 융족은 일 년 내내 이동하지 않고 머무는 바람에 소와 말이 절반이나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목공은 유여를 곁에 두고 날마다 같은 음식을 나눠먹으며 오래 붙잡아두었다. 나중에 유여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 왕에게 음악을 중단하도록 간하였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진나라가 유여에게 자주 사람을 보내고 초청하여 융왕이 점차 의심하게 되자 마침내 유여는 진나라로 투항해 왔다. 그로부터 2년 뒤 진 목공은 융왕을 토벌하고 12개의 부족국가를 병합하여 천리나 되는 땅을 개척했다.

이야기 PLUS

손바닥만한 중원이 전부였던 중국이 지금처럼 대륙 안쪽으로 크게 확장되는 데에는 진 목공의 공이 크다. 목공이 서융을 정복했을 때 주나라 천자는 중신을 보내 축하하고 쇠북(징과 북)을 선물로 하사했다. 중원의 제후국들로부터 무시 받던 변방의 나라는 다른 제후들과 더불어 패권을 다투는 주요 제후국의 하나가 되었다. 후일 진시황 정(政)이 중원을 통일하는 데 필요한 국력의 기반이 이때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백리해와 건숙을 등용해 제도를 정비했고, 유여를 영입해 서쪽 땅을 개척했다. 그러나 목공 때까지도 진나라에는 순장제도가 있었다. 왕의 곁을 지키던 177명의 사람들이 왕의 무덤에 함께 묻혔다. 이러한 인적 손실이 없었다면 진나라는 한층 일찍 강성했을 거라고도 한다. 순장제도는 이후 폐지됐다.

진 목공이 호화로운 궁월과 보물들을 보여주자 유여가 말했다.
“이러한 건축과 보물들은 귀신에게 만들어내라 해도 힘들 일인데, 하물며 사람들에게 만들도록 할 터이니 백성들은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丁明 : 시인 peacepres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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