晉 문공의 보복

信國之寶也 民之所庇也 신국지보야 민지소비야
신용은 국가의 보배다. 그것으로 백성을 지키는 것이다. (<左氏傳> 희공25년)
문공이 제후국을 정벌할 때 原을 사흘동안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면서

주 천자 양왕이 이복동생 대에게 쫓겨 정나라에 피신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양왕은 섬진과 당진의 군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섬진의 목공은 즉시 군대를 동원해 천자를 도우러 나섰다. 의협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 기회에 천자를 도움으로써 변방국인 섬진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당진의 문공은 망설였다. 아직 정권이 안정돼있지 않기 때문에 나라를 비우고 원정을 나서기가 꺼려진 때문이다. 진 문공의 충신인 호언(狐偃)이 말하기를 “제후로서의 신망을 얻기 위해서는 천자를 위해 힘쓰는 것보다 효과적인 것이 없습니다.” 문공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나 점을 쳐본즉 화천대유(大有) 화택규(暌)의 괘를 얻었으므로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양왕을 구원하러 나갔다.

구원군의 주력은 섬진의 군사들이었지만, 당진의 문공은 스스로 선봉이 되어 양왕을 구했다. 실익에 있어서 섬진의 목공이 얻은 명분보다 당진의 문공이 얻은 보상이 훨씬 컸다. 양왕은 반역자인 대를 잡아 죽이고 정권을 회복한 뒤에 진 문공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진 문공은 천자의 허락을 받아 주나라 주변에서 반란에 가담했던 나라들을 정벌하고 그 땅을 차지함으로써 영토를 확장하였다.

2년 뒤 초나라가 동맹국 제후들을 규합하여 송(宋)을 공격했다. 초나라군이 도성을 포위하자 송의 대부 공손고가 진 문공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침 문공은 자신의 망명시절 자신을 도운 나라들과 친분을 강화하고 자신을 홀대했던 나라들에 대해 보복할 생각이었다. 송 양공은 먹을 것도 없이 떠돌던 공자 중이 일행을 융숭히 대접했었다. 문공으로서는 은혜를 잊을 수가 없을뿐더러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제후로서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도 있었다. 다만 송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그 상대국인 초나라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좀 난처했다. 초 성왕 또한 망명시절 문공을 잘 대접한 군주가 아니던가.

호언이 말했다. “초나라는 최근에 조(曺)나라를 얻고 또 위(衛)나라와 혼약을 맺었습니다. 이 두 나라를 공략한다면 초나라가 그들을 구원하러 와야 할 테니 자연히 송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 수밖에 없게 됩니다.” 조나 위를 공격하는 일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조나라 군주는 망명중인 중이를 예사로이 여겼고 목욕하는 알몸을 훔쳐보는 무례까지 저질렀다. 또 위나라 군주로 말하자면, 중이가 본국으로부터 오는 자객들을 피하여 제나라로 향할 때 아예 외면하여 밥도 굶은 채 지나쳐야 했다. 시골 마을에서 밥을 구걸했을 때 위나라 사람은 흙 묻은 밥을 주어 수모를 느끼게 했다.

문공은 먼저 위나라에 전통을 보내 조나라를 공격할 터이니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위와 조는 동맹국이었으므로 이 부탁은 당연히 거절되었다. 문공이 예상한 대로였고, 또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문공은 길을 우회하여 조나라를 먼저 기습했다. 조나라에는 현명한 대부 희부기가 있다. 희부기는 공자 중이가 자기 군주에게 모독을 당했을 때 은밀히 먹을 것을 보내 대접하고 원한을 풀려고 했었다.

진나라가 포위해오자 희부기는 군주에게 지난 일을 사죄할 것을 권했으나 군주는 그저 자기 잘못을 무마하기 위해 미녀 3백명을 화려한 수레에 태워 문공에게 보냈다. 문공은 더욱 분격하여 도성을 짓밟고 군주를 질책했다. 다만 희부기의 집에는 일절 손을 대지 말라고 일렀다. 진 문공은 은혜와 원수를 구분하는 데 철저한 사람이었다.

조를 정벌한 진나라 군대가 위나라로 진격하자 위나라 성공이 두려워하며 진과 동맹 맺기를 청해왔다. 그러나 문공은 응낙하지 않았다. 위의 동맹국인 초나라가 진격해 왔으나 위나라를 구원하지 못했다. 위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군주를 몰아내고 진에 항복했다.

이야기 PLUS

‘뒤끝’이라는 말이 있다. 원수는 원수로 갚고 은혜는 은혜로 갚는다. 문공은 그가 유랑하던 시절 여러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받았던 수모와 은혜 어느 것도 잊지 않고 철저히 되돌려주었다. 계산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진(晉)의 군대가 위나라를 공격할 때, 초나라 군대는 송의 포위를 풀고 위나라를 구하러 달려왔다. 진의 군대가 초군과 마주치자 문공은 90리를 후퇴했다. 이길 수 있는 싸움에서 후퇴하는 것을 장수들이 반대했으나 문공은 말했다. “초 성왕의 은혜에 보답하여, 군대끼리 마주치면 90리를 양보하기로 약조했으니 지켜야 한다.” 초 성왕도 군대를 물리려 했으나 승리에 눈이 먼 초나라 장군 성자옥(成子玉)이 왕의 뜻을 거역하고 공격해왔다. 진 문공은 그제야 공격하여 자옥을 물리쳤다. 자옥은 패하고 돌아가 처형당했다. 뒤끝 철저한 사람에게 원한을 사서 좋을 일은 없다.

진이 위나라를 친 ‘성복의 전투’에 대해 상세히 다 쓰지는 않겠지만, 일련의 전투가 끝나고 문공은 제후들을 불러 회맹하였다. 여기에 주 천자 양왕도 참석하여 문공에게 후한 상과 천자의 표식을 내렸다. 진 문공은 이로써 천하의 제후들을 이끄는 패자(覇者)가 되었다.

군대가 초군과 마주치자 문공은 90리를 후퇴했다.
“후퇴는 수치입니다.” 반대하는 장수들에게 문공이 말했다.
“초 성왕의 은혜에 보답하여, 군대끼리 마주치면 90리를 물러나겠다고 약속했으니 지켜야 한다.”

丁明 : 시인 peacepres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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