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견서' 들이대며 "보험금 못 줘"…분쟁조정 들어가면 뒤집히기 일쑤

[보험매일=이흔 기자] A씨는 잠들기 전 멀쩡했다. 그러나 이튿날 깨어나지 못했다. 자는 도중 사망한 것이다.

유족의 요청으로 검안의는 A씨 시신에서 혈액을 뽑아 '트로포닌(Troponin) Ⅰ' 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 급성심근경색이 사인으로 나왔다.

유족은 A씨가 생전 들어놓은 보험 약관대로 진단비 5천만원과 사망보험금 1억원을 청구했다.

보험사는 한 순환기 내과 의사에게 의료자문을 부탁했다. 해당 의사는 "트로포닌 Ⅰ 검사만으로는 급성심근경색을 사인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소견서를 써줬다.

이를 이유로 보험금 지급이 거절되자 A씨 유족은 올해 7월 금융감독원에 분쟁조정을 신청했다.

금감원은 분쟁조정위원회 전문위원인 법의학 교수들에게 물었다. 이들은 "무슨 소리냐. 트로포닌 Ⅰ은 심근경색을 진단하는 유효한 검사 방법"이라고 했다.

법원 판례에서도 트로포닌 검사를 토대로 급성심근경색 진단비를 지급한 경우가 나왔다. 보험사는 그제야 보험금 1억5천만원을 내줬다.

보험사가 이처럼 의료자문을 핑계 삼아 보험금을 주지 않으려고 버티던 관행에 제동이 걸린다. 금감원과 업계가 '의료분쟁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다.

첫 진단서를 가장 권위 있는 '의학적 증거'로 삼는 게 핵심이다. 진단서가 위·변조되지 않았다면 보험금을 줘야 하는 게 원칙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환자를 보지도 않고 보험사가 건넨 서류만으로 써주는 게 의료자문 소견"이라며 "진단서를 뒤집을 정도가 아니면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보험사들은 최근 4∼5년 전부터 의료자문을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건당 수천만∼수억원의 보험금을 아꼈다.

특히 경계성 종양, 기왕증 질병 등 의학적 쟁점이 첨예한 분쟁만 자문이 이뤄졌던 게 단순한 입원·치료 일수까지 확대됐다.

보험사기와 도덕적 해이에 따른 보험금 누수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보험사들의 논리였다.

한 생명보험사 관계자는 "의료자문은 보험사의 고유 권리"라며 "불필요한 보험금 지급은 선량한 대다수 계약자의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험금 지급을 객관적으로 검증한다는 보험사의 의료자문 취지는 갈수록 '거절을 위한 거절'로 변질했다고 금감원은 지적했다.

2014년 5만4천399건이던 의료자문은 2015년 6만6천373건, 2016년 8만3천580건, 올해 상반기에만 4만8천923건으로 늘고 있다.

보험사들이 쓴 자문료는 2014년 91억원에서 지난해 155억원, 올해 상반기 98억원으로 늘었다.

보험사들은 이를 근거로 100건 중 60∼70건꼴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다. 건당 수천만∼수억원의 보험금이 매년 수만건씩 나가지 않은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보험사 보상 파트는 보험금 부지급 건수와 금액이 주요 평가 지표"라며 "이 때문에 의료자문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의료자문은 보험사에만 좋은 게 아니다. 자문 계약을 맺고 소견서를 써주는 의사에게도 쏠쏠한 수입원이다.

139개 병원의 의사 820명이 생명보험사들과, 115개 병원의 의사 524명이 손해보험사들과 자문 계약을 맺고 있다.

자문료는 건당 30만∼100만원이다. 한 대학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지난해 소견서만 400건 썼다. 평균 50만∼60만원으로 잡아도 2억원 넘는 수입을 올린 셈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교통사고 등에서 장해등급 판정에 관여하는 정형외과와 신경외과 교수들이 의료자문 1·2위"라고 말했다.

그는 "의사가 외부 자문에 업무 시간을 빼앗기는 게 문제라고 판단해 의료자문을 신고하도록 하는 병원도 생겨났다"고 전했다.

금감원은 보험사의 의료자문 절차를 까다롭게 하는 동시에 병원명, 전공과목, 자문횟수 등 보험사의 의료자문 현황을 공개하기로 했다.

이는 자문 계약을 맺은 병원과 의사에도 부담일 수 있다. 실제로 추진 과정에서 해당 의사들이 강력히 반발했다는 후문이다.

 

저작권자 © 보험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