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대부 백리해

臣亡國之臣 何足問 신 망국지신 하족문
신은 이미 망한 나라의 신하이온데 어디에 쓰려 하십니까. (<史記> 秦世家)
秦 목공이 멸망한 우나라 출신 현자 백리해를 쓰려 하자 백리해가 사절하며

우공과 함께 끌려간 백리해(百里奚)가 진나라에서 우공을 모셨다. 우공은 더 이상 군주가 아니었지만, 그에게 녹봉을 받던 신하로서의 마지막 보답과 같은 것이었다. 괵나라에서 잡혀와 진 헌공의 신하가 된 주지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백리해의 총명을 아깝게 여겨 헌공에게 천거하자 헌공이 그를 부르려 했다. 그러나 백리해가 거절했다. 나라가 이미 망했으니 새 주인을 찾는 것이야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이 섬기던 주인의 나라를 멸망시킨 원수에게로 전향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던 차에 진(秦)나라와 혼담이 오갔다. 헌공의 첫째부인 제강이 낳은 맏딸이며 죽은 신생의 누이이기도 한 백희를 진 목공(穆公)에게 시집보내는 혼사였는데, 헌공은 백리해를 잉신으로 따라가게 했다(이제부터 두 진나라를 구분하기 위해 진(晉)을 ‘당진’으로, 진(秦)을 ‘섬진’으로 구분하기로 하자. 이 구분은 전통적으로 두 나라의 유래와 지명을 따라 흔히 수식해 부르는 명칭이다.).

그런데 혼인행렬이 섬진으로 가는 도중 백리해가 사라졌다. 두 나라 사이의 국혼이 무사히 끝난 후 섬진에서는 신부 일행의 명단을 보고 한 사람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마침 섬진의 대부 중에 당진에서 온 공손지라는 사람이 백리해란 이름을 알아보았다. 그는 진 목공에게 아까운 사람이니 반드시 찾아서 시험해보라고 권했다.

섬진은 변방의 국가였다가 바야흐로 제후국들 가운데서 세력을 넓혀가는 터였다. 그러나 힘은 있어도 머리는 부족했다. 인재 구하기에 힘쓰던 목공은 지체 없이 사람을 풀어 백리해를 찾게 했다.

백리해가 발견된 곳은 초나라였다. 한때 풍운의 꿈을 안고 중원을 돌아다니다가 겨우 작은 나라에서 벼슬 하나 얻었더니, 그 조차 어리석은 군주의 오판으로 나라가 망해버려 포로가 되지 않았던가. 이제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공녀의 몸종으로 끌려가게 되다니. 백리해는 이런 노예적인 생활로부터 벗어나 차라리 자유를 얻고자 했다. 동쪽으로 바다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 소 키우는 목부로 취직했다가, 그곳을 지배하는 초나라 관리들의 눈에 띄어 말을 돌보는 목부가 되었던 것이다. 진 목공이 예를 갖춰 그를 데려오려 하자 공손지가 만류했다.

“그가 지금 마필의 관리사로 지낸다는 것은 초나라에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를 데려오기 위해 많은 예물을 보내면 그의 정체가 드러날 터이니, 초나라는 그를 돌려보내지 않고 자신들이 등용하거나 안 되면 죽여버릴지도 모릅니다. 단지 약소한 선물을 보내면서 도망간 죄수를 처벌할 수 있게 보내달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목공이 초나라에 염소가죽 다섯 장을 보내 백리해를 소환하였다.

잔뜩 기대를 갖고 백리해를 만나보니, 바닷가에서 말을 돌보다 끌려온 노인의 모습은 생각보다 초라하였다. 목공이 나이를 물으니 벌써 칠십이 되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목공이 입맛을 다시면서 “너무 늦게 만나 아쉽구려”라고 했다. 이미 실망했다는 뜻이다.

백리해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공께서 나는 새를 잡거나 맹수를 잡거나 무거운 짐 나를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면 신은 늙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나랏일을 경영할 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신도 아직 쓸모가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 강태공은 여든 살 나이에 위수에서 낚시로 소일하고 있었지만, 문왕이 그를 수레에 태우고 가서 신하로 삼고 주나라를 일으켰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자리에 얼마나 걸맞은 사람인가가 중요한 법입니다.”

명쾌한 답변에 정신이 번쩍 든 목공은 그때부터 백리해와 더불어 사흘 밤낮으로 국제정세와 국가경영에 관하여 담론하였다. 목공이 기뻐하며 백리해를 상경으로 삼으려 하자 백리해가 말했다. “신은 망한 나라의 신하인데 어찌 쓰시렵니까(臣亡國之臣, 何足問).” 그러자 목공이 말했다. “우공은 그대를 쓰지 않아 망한 것이니, 그대의 죄가 아니오.” 백리해가 다시 조아리며 말했다. “저에게 건숙이란 벗이 있는데, 신보다 열 배는 뛰어납니다. 주공께서 큰 뜻을 품으셨다면 그를 불러 나랏일을 맡기시고 신으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하십시오.”

이로써 진 목공은 백리해를 얻고 또 건숙을 얻었다. 한참 기세 오른 호랑이가 좌우에 날개까지 얻은 격이었다. 후일 진나라가 초강국이 되어 중원을 통일하기까지 기여한 인물들 가운데 백리해와 건숙은 그 초석을 놓은 현인들로 꼽힌다.

이야기 PLUS
백리해는 본래 산촌에 묻혀 책을 읽던 사람이다. 30대에 세상 밖으로 나가 가장 먼저 제나라였다. 제나라는 공손무지가 폭군 양공을 죽이고 왕 노릇을 하던 때다. 어찌어찌 줄을 대서 관직을 얻게 되었는데, 마침 건숙이라는 현인을 만나게 된다. 건숙은 백리해의 말을 듣고는 무지의 권력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며 섬길만한 사람도 못된다고 충고했다. 백리해는 건숙과 의형제를 맺고 천자가 있는 주나라로 갔다.

마침 장왕의 서자 퇴(頹)가 소를 몰고 다닐 때라 백리해는 소 치는 재주로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퇴가 조카 혜왕을 몰아내고 왕권을 빼앗을 생각이 있으므로 잘하면 벼슬의 기회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마침 건숙이 와서 퇴를 한번 만나보고는 백리해에게 그를 떠나라고 충고했다. 백리해가 목공에게 말하기를 “두 번은 건숙의 말을 들어서 죽음을 면했고, 세 번째 우나라에서는 봉록을 탐내어 건숙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우공의 수난을 당했다”고 하였다. 진 목공이 염소가죽 다섯 장을 주고 얻은 대부라 하여 오고대부(五羖大夫)라고도 불렀다.

맹수를 사냥하거나 무거운 짐 나를 장사가 필요하시다면 신은 늙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경륜을 필요로 하신다면 아직 젊습니다. 강태공이 문왕을 만나 주나라를 일으킬 때 나이는 여든이었습니다.

丁明 : 시인
peacepres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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