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시인과 함께읽는 사기(史記)
“국방은 학(鶴)에게 맡기시지요”
이흔 기자  |  xionm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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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06  1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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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命如何取賂還(奉命取賂) 봉명취뢰
왕의 명을 받들고 가서 어찌 뇌물을 받고 돌아오는가 (苒雍의 古詩)
제 환공이 천자의 명으로 위(衛)를 문책하러 갔다가 뇌물을 받고 돌아온 일을 꼬집어

위나라 의공(懿公)은 혜공의 아들이다. 그의 할아버지 선공은 아들에게 맺어주기로 한 신부감(제나라 출신 선강)을 가로챈 호색가였으며, 선강에게서 태어난 아버지 혜공은 불과 15세의 나이에 선강과 함께 계교를 꾸며 태자인 급을 죽이고 후계 자리를 빼앗은 장본인이다.

선공과 혜공의 혈통을 이은 의공은 어떠했을까.

당초 혜공 삭(朔)이 형들을 죽이고 왕이 됐을 때 선왕을 모시던 대부들이 정의를 바로잡고자 난리를 일으켜 혜공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혜공은 제나라로 달아났고 대부들은 죽은 태자의 동생 검모(黔牟)를 군주로 세웠다. 그로부터 8년째에 혜공은 불한당으로 유명한 제 양공의 도움을 받아 공격해 군주의 자리를 되찾았으며 검모는 급히 주나라로 달아났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나 위 혜공은 곧 연나라와 연합하여 주나라를 공격했다. 아무리 주나라가 힘이 없다 해도 천자의 나라를 공격했으니 하극상, 반역을 일으킨 것이다.

신하의 나라로써 감히 주나라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주나라에 왕권 찬탈을 노리는 퇴(頹)와 같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혜왕의 자리를 노리던 왕족(삼촌) 퇴는 자기 패거리들과 함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위나라와 연나라를 끌어들였다. 퇴의 욕심과 위 혜공의 원한이 맞아떨어졌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위 혜공, 왕자 퇴와 같은 패륜아들이 뭉쳤으니 어찌 시대가 혼란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천자인 주나라 혜왕이 온(溫)으로 피신하자 위 혜공은 제멋대로 폐왕을 선언하고 혜왕의 삼촌인 퇴를 왕으로 세운 뒤 돌아갔다. 혜공은 정(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망명 3년째에 정나라가 퇴를 공격하여 쫓아내고 혜왕을 복위시켰다.

위나라에서 혜공이 죽고 아들 의공이 즉위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였다.

백성들은 그 아버지 혜공을 미워했듯이 아들 의공에 대해서도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의공은 그런 열등감과 소외감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술과 춤과 사치로 날을 보냈다. 그 사치의 절정은 바로 학을 기르는 취미였다. 애완동물에게 지나치게 공을 들이는 사람들은 언제나 볼 수 있지만, 한 나라의 군주가 그 취미에 빠져서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는 건 분명히 큰 문제였다. 군주가 살아있는 학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백성들 가운데는 학을 잡아서 보상을 받으려는 자가 늘어났고, 털빛이 좋은 학을 바쳐서 아첨하려는 자들도 줄을 잇게 되었다. 의공은 한껏 차려입고 나들이를 나설 때마다 선두에 학을 세워 그 기품을 뽐내게 했는데, 심지어는 선두 마차에 태운 학에게는 무슨 장군이라는 명칭을 주어 백성들로 하여금 예의를 차리게까지 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의공이 특히 사랑하여 관직의 품계를 내린 학은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학을 사들이는 비용과 학의 우리를 늘리는 데 드는 비용, 학의 먹이를 공급하기 위한 비용들이 적지 않았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릴 때에도 군주의 학들은 포동포동 살이 올랐다. 자연히 원망이 자자했다.

나라의 위기는 그럴 때 찾아오는 법이다. 적(狄)은 중국 북부에 퍼져있는 야만족의 명칭이다. 적족의 위세가 커져 위나라를 침공해왔다. 의공이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으나 백성들이 응하지 않았다. 장안에 불평이 들끓었다. “왕이 기르는 학 중에 장군도 많으니 그들에게 막으라고 하지 않고 왜 백성을 소집하는가.”

의공은 그동안의 실정을 뉘우치면서 학을 다 날려보낸 뒤 백성들이 믿는 중신 석기자(石祁子)에게 하소연하고서야 얼마간의 병졸을 모을 수 있었다. 의공 스스로 선봉장을 맡아 출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적족에게 둘러싸여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위나라 사람들은 의공이 죽은 데 대하여 별로 원망이 없었다. 오히려 의공의 자손들을 배제하고 본래 혜공에게 죽은 태자 급의 혈통 가운데서 후계자를 찾아 새 군주로 세웠다. 급과 검모의 동생 소백에게서 태어난 공자 신(申)이 군주가 되었다. 대공(戴公)이다. 대공이 또 죽었다. 제나라 환공이 송나라와 함께 출정하여 적족을 물리치고 국경에 성을 쌓아주었다. 대공의 아우가 승계하니 문공(文公)이다. 문공이 백성의 조세를 감면하고 형벌을 공정하게 바로잡으며, 솔선수범하여 근면의 본을 보이니 비로소 나라가 안정되었다.

이야기 PLUS

주나라 혜왕의 위기는 나라 안에 왕권찬탈을 노리는 왕족을 내버려두었기에 찾아왔고, 위나라 의공의 위기는 백성의 삶을 돌아보지 않고 사치하여 민심을 잃었기에 찾아왔다. 나라의 안정이란 왕권의 안정에서 보장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나라 안팎에 나라의 대권을 위협하는 요인이 없어야 하고 동시에 민심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주나라 혜왕이 정나라의 도움으로 왕위에 복위한 뒤, 위 혜공의 반역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하여 제 환공에게 위나라 토벌을 명한 적이 있다. 주 혜왕 11년(BC 666년) 제 환공이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에 도착하자 이미 혜공 삭은 죽고 그 아들 의공 3년째였다. 의공은 한차례 싸워 패하고 성안으로 돌아간 후 공격해온 이유를 물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잘못을 어찌 아들에게 묻느냐고 변명하면서 맏아들 개방(開方)을 보내 금은과 비단 다섯 수레를 바쳤다. 환공이 제물을 보고 입이 벌어지면서 ‘그 말이 맞다’하고는 그대로 돌아갔다. 세론(世論)은 이를 두고 봉명취뢰(奉命取賂)라 하며 비웃었다. 왕의 명령을 받고 나가 뇌물을 받고 돌아왔다는 뜻이다. 이때 개방이 제 환공의 신하가 되고 싶다며 따라갔다. 왕에게 의공의 여동생들이 예쁘다고 일러 위나라 여자들까지 취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환공을 죽게 한 세 사람의 제나라 간신 중 하나인 개방이 바로 이 사람이다.

의공이 외적을 막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으나 백성들이 응하지 않았다. “왕이 평소 학(鶴)을 사랑하여 장군으로 삼더니, 왜 이제 와서는 백성을 소집하는가.”

丁明 : 시인 

peacepres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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