哀樂失時 殃咎必至 애락실시 앙구필지
슬픔과 즐거움도 때에 맞지 않으면 필시 재앙을 부른다. (<春秋左傳> 莊公20년)
주나라 혜왕의 왕위를 빼앗은 퇴(頹)가 연일 가무를 즐기자 정나라 제후가 비판하며

제나라 환공이 천하를 움직이던 시절에 천자국 주(周)나라에서는 장왕(莊王)에 이어 희왕(釐王)-혜왕(惠王)-양왕(襄王)이 재위했다. 50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여러 왕이 바뀐 데서 알 수 있듯, 이 시기에 주나라에는 여러 차례 난리가 있었다. 장왕 혜왕 양왕이 차례로 변란을 치렀는데, 그 화근은 모두 부왕의 서자(庶子)에게서 비롯됐다.

먼저 장왕은 아버지 환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직후 숙부인 흑견(黑肩)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흑견은 장차 장왕을 죽이고 장왕의 이복동생인 극(克)을 세우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자 왕자 극은 연(燕)나라로 달아났다. 장왕이 15년을 재위한 뒤 아들 희왕에게 대를 물려주었다. 희왕이 겨우 5년 만에 죽자 그 아들 혜왕이 즉위하였다.

본래 장왕에게는 총애하는 아들이 따로 있었다. 늘그막에 애첩 요(姚)가 낳은 아들 퇴(頹)였는데, 아버지의 총애를 믿고 행실이 거만했다. 희왕이 등극한 뒤에도 패거리를 몰고 다니며 행실이 그대로더니, 희왕이 죽고 조카 혜왕이 등극하자 더욱 오만방자해졌다. 소를 몰고 들판을 휘젓고 다니며 백성들의 논밭을 짓밟는가 하면 관원들을 농락하며 질서를 어지럽혔다. 그를 따라다니며 세도를 부리는 측근들은 대부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혜왕이 대부들의 땅을 빼앗아 왕실의 동물원으로 만들어버렸다. 즉위 2년째다. 기분이 상한 대부 다섯 사람은 연나라 위(衛)나라와 내통하여 군대를 불러들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혜왕은 황급히 몸을 피하여 온(溫)으로 가서 정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그때 정나라는 여공이 다스리고 있었다. 여공은 군대를 보내 혜왕을 호위하여 역(櫟)이란 고을로 가서 머물게 했다. 예전에 정 여공은 자신의 집권을 반대하던 대부 제중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오히려 쫓겨나 6년을 피해 있은 적이 있다. 그때 여공이 송나라 지원군의 보호를 받으며 농성하던 곳이 바로 역읍이었다.

혜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퇴와 그의 대부들은 즉위식으로 시작하여 연일 축하연을 열고 음주가무로 흥청거렸다. 이에 정 여공이 괵나라 군주에게 말했다.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것도 때에 맞지 않으면 재앙을 부른다 들었소이다. 지금 왕이 된 퇴는 음주가무에 지칠 줄 모르니 이는 화를 즐기는 것입니다(哀樂失時 殃咎必至 今王子頹歌舞不倦 樂禍也).” 이듬해 봄 여공은 괵나라와 함께 진군하여 주나라 수도를 회복하고 혜공을 복위시켰다.

20년 뒤 혜왕이 죽자 아들 정(鄭)이 뒤를 이었다. 양왕(襄王)이다. 양왕이 겪은 변란도 아버지들과 비슷하다. 정이 아직 어릴 때 어머니가 죽어 혜왕은 새 부인을 얻었는데, 새 부인에게서 아들이 태어나자 왕은 아들의 이름을 대(帶)라 하고 총애했다. 양왕이 등극한지 3년째에 대가 왕위를 탐내 이민족 융(戎)과 적(翟)을 끌어들였다. 양왕이 음모를 알아채고 대를 부르자 대는 그 길로 달아나 제(齊)나라로 갔다. 제나라 군주 환공은 대를 받아들였으나, 한편으로는 융과 적의 공격을 막아달라는 혜왕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파견했다. 관중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융을 평정하니 양왕은 관중을 상경의 예로 대하려 하였다.

관중은 극구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신하의 신하로 아주 낮은 자일뿐이옵니다. 저를 상경의 예로 대하시면 천자께서 다른 제후들을 대하실 때는 어찌 하시렵니까.” 양왕은 하는 수 없이 관중을 하경의 예로 대하여 치하하였다.

말이 천자(天子)일 뿐 맹수 같은 열국의 그늘에서 숨도 쉬기 어려운 양왕으로서는 중원의 패자인 제 환공에게 좀 더 의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혜왕 역시 퇴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가 복위한 뒤에 제 환공에게 백(伯)의 작위를 내려 호의를 표시한 적도 있다.

제 환공은 천자의 양해 아래 아홉 차례나 제후들을 불러 회맹을 가진 적이 있다. 규구에서 모였을 때다. 양왕은 환공에게 제사 지낸 고기와 주홍색 화살을 수레와 함께 보내 권위를 더해주었다. 이때 양왕은 환공에게 엎드려 절하지 말고 서서 받으라고 하였다. 환공을 신하 이상의 자격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듣고 있던 관중이 그러지 말도록 충고하여 제 환공은 신하의 예를 갖추고 하사품을 받았다. 그럼에도 제후들 사이에서는 ‘제 환공이 거만해졌다’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야기 PLUS

인간 사회에서 예(禮)가 중요한 것은 한 집단 내에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만일 질서를 유지하는 서열 기준이 체구의 크기나 완력, 미모나 재력, 지능 같은 것으로 단순화된다면 그 집단은 원초적인 동물의 세계나 다름없게 될 것이다. 올바른 예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힘만이 서열의 기준이 된다. 주먹만 힘으로 치는 게 아니다. 먼저 들어온 순서와 계급으로 서열이 결정되는 군대나 사회조직도 있고, 성적과 성과 순서로 인간 가치를 결정하는 학교나 기업도 있다. 학벌순, 재력순, 미모순, 심지어는 들고 있는 가방의 명품 가치로 서열을 삼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런 가치기준을 천박하다 말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운 사회는 찾아보기 어렵다.

주나라 왕실에서는 왕권을 노리는 서자들의 욕심 때문에 왕실의 예가 무너지고, 그로인해 권력다툼이 거듭되었다. 그런 왕실이 제후들에게 권위를 잃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춘추시대 각 제후의 나라들도 비슷한 변란을 번갈아 겪었다. 주나라 왕실의 문란함에서 시작하여 한 시대가 문란해졌으며, 왕들은 제후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했다. 아무리 천자라 하더라도 스스로 예를 저버린 뒤에는 권위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양왕이 제 환공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보내면서 엎드려 절하지 말고 받도록 권했다. 듣고 있던 관중의 충고를 따라 환공은 신하의 예를 갖췄다. 그럼에도 제후들은 ‘환공이 거만해졌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丁明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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