倉廩實 知禮節 창름실 지예절
백성은 곡식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 (<史記> 管晏列傳)
관중의 경제정책의 기본 정신을 나타낸 관중의 말

관중의 연락을 받고 여유롭게 전진한 규 공자와 호위부대는 6일 뒤에야 관중의 선발대와 합류해 도성으로 향했다. 성이 보였으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성곽에는 새로운 빗발들이 나부끼고 성루에는 장수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이 외쳤다.
“여기 이미 소백 공자님이 도착하여 군주가 되셨다. 이제 누가 또 왕을 자처하는가.”
놀라서 바라보니 소백을 시위하던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은 이미 제나라의 관군을 거느리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 소백에게 활을 쏘았던 관중이 혼란한 와중에 너무 성급히 단정 지은 게 실수였다. 화살은 소백의 복부에 명중했지만, 실제로는 소백의 겉옷 속 요대에 달린 금속 교구에 맞아 전혀 상처를 입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백의 시위들은 그 자리에서 맞서지 않고 중상을 입은 척 곡을 하여 경쟁자들을 안심시킨 후 전속력으로 도성에 들어가 왕권을 인수한 후 뒤따라오는 규 공자의 진입에 대비했던 것이다. 경주에서 졌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는 없다.
“어서 몸을 피하소서.” 규 공자 일행이 말머리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성으로부터 추격부대가 쏟아져 나왔다. 규 공자는 사력을 다하여 노나라로 후퇴했다. 제나라군은 굳이 접전할 의도가 없는 듯 대오를 유지하며 노나라까지 따라왔다. 소백의 통첩이 전달되었다.
“새로 군주가 된 소백은 노나라 군주에게 청합니다. 공자 규는 혈육이라 어찌할 수가 없으니 청컨대 노나라에서 처단해주십시오. 소홀과 관중은 나와 원수가 되었으니 내게 돌려주십시오. 내 직접 그들을 찢어 죽여 분을 풀려고 합니다.”
노나라는 제나라에 맞설 힘도 없고, 굳이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대세가 결정되었으니 새 군주 소백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 노나라는 규를 처단했다. 그러자 소홀은 스스로 칼을 꺼내 자진했다. 소홀이 죽음을 앞두고 관중에게 말했다. “자네는 살아서 신하가 되게. 나는 죽어서 신하가 되겠네. 공자에게 나는 죽어서 충성한 신하가 될 것이고 자네는 살아서 충성한 신하가 될 것이네.” 소홀이 노나라에서 돌아오기 전에 자결한 것은 그가 규 공자를 섬긴 것이 바로 규 공자를 위해서였기 때문이며, 관중이 제나라로 돌아온 것은 규 공자를 섬긴 것이 제나라를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관중은 포박당한 채 수레에 실려 끌려갔다. 포숙은 곧 관중을 자신의 장막으로 데려오게 해서 오라를 풀고 새 옷을 내주었다. 보기에 따라 그것은 포숙의 관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오래 전부터 예상하고 계획한 것이기도 했다.
긴 밤을 재회의 기쁨으로 지새운 뒤 포숙은 관중을 소백에게로 안내했다. 소백이 바로 제 환공이다. 제 환공은 춘추오패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하고 뚜렷한 족적을 남긴 제후였다. BC 685년부터 643년까지 무려 43년간 재위하면서 제나라는 물론 여러 제후국들의 맹주로 군림했다. 제 환공을 보필하여 중원의 패자로 만든 대신들은 관중 포숙 습붕 고혜 등인데, 이 가운데 관중의 능력이 으뜸이다.
처음에 소백은 자신을 죽이려던 관중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포숙이 말했다. “한 사람의 제후로서 만족하시려면 저나 습붕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중원의 패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절대로 관중이 없이는 안 됩니다.” 환공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만일 개인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관중을 죽여버렸다면 중원의 맹주 제 환공은 없었을 것이다. 포숙이 환공을 설득하며 나눈 이야기는 여러 기록에 꽤 길게 나온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포숙의 말을 믿고 관중을 등용한 환공 스스로가 그만한 그릇을 지닌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이야기 PLUS
제 환공의 치세는 바로 관중의 치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중은 인의(仁義)에 치중한 당대의 다른 성인들과 달리 국가경제에 대한 완벽한 이론과 전략을 완성했다. 외교 군사 인사(人事), 제례는 물론 치산치수 산업 농업 어업 토목 복지에 이르기까지 국정에 필요한 전 분야를 빠짐없이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직제를 만들어 근대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그의 사상과 이론, 아이디어들은 <관자>라는 방대한 저술을 통해 전해오고 있다. 문서화된 법제를 통해 나라를 다스렸으므로 법가(法家)의 원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그의 사상은 경제정책에서 독보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백성은 곡식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차리며, 의식이 풍부해야 명예와 수치를 알게 된다(倉廩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는 말은 경제정책의 바탕에 깔린 관중의 경제관이라 할 수 있다.
‘노동과 토지의 결합이 없이는 재부(財富)를 창출할 수 없다. 천하의 모든 생산은 노동력의 사용에서 나온다.’ 서양에서는 근대 경제학에서나 볼 수 있는 토지와 노동의 경제학적 개념도 관중의 저술에 등장한다. 이로 보면 관중의 통찰력은 서양 경제학에 2천년쯤 앞섰다고 볼 수도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물론, 플라톤의 <국가론>보다도 3백년이나 앞섰다.

“규 공자는 혈육이라 우리 손으로 죽이기가 곤란한즉, 노나라에서 처단해주기를 바란다. 관중과 소홀은 나와 원수가 되었으니 포박하여 넘기라. 내 직접 그들을 찢어 죽여 분을 풀겠노라.”

丁明 : 시인 
peacepres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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