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사 고객계좌 허용해야" vs "'삼성은행' 만들어질 것"

[보험매일=이흔 기자] 보험사에 고객의 결제계좌를 허용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은행과 보험사 간 일전이 벌어지고 있다.

보험사들은 금융업 간 벽을 허물고 고객 편의를 높이기 위해 보험사에서도 자유롭게 고객 계좌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은행들은 재벌계 보험사의 운신 폭이 더 커질 경우 실질적인 '삼성은행'이 출현할 수 있다며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은행장과 보험사 최고경영자(CEO)들마저 총출동한 '로비 전쟁'이 벌어지면서 올 한해 두 업권 사이에 첨예한 대립 구도가 형성될 전망이다.'

◇ 은행들 "보험사에 결제계좌 허용하면 '삼성은행' 출현"
5일 금융권에 따르면 정부가 올해 경제정책방향에서 보험사의 지급결제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히면서 은행과 보험사 간에 이를 둘러싼 치열한 대정부 로비전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은행장 10여명이 관련 입법을 담당하는 국회 정무위원장을 만나 입장을 전달하자, 바로 다음날 보험사 사장 9명이 정무위원장과 회동을 갖는 등 그 로비전은 CEO급에서 직접 이뤄지고 있다.

보험사들은 3년 전의 설욕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다. 2008년에도 정부가 보험사의 지급결제를 허용한다는 방침을 밝혔으나, 은행들의 끈질긴 로비로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2012년 18대 국회의 임기가 끝나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은행들도 강경하기는 마찬가지다. 금융당국의 눈치를 보는 데 이골이 난 은행권이지만, 이번만은 절대 물러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보험사에 지급결제가 허용되면 보험사는 은행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고객들은 보험사 계좌에서 급여 이체, 카드대금 결제, 공과금 납부, 자동이체 등 은행과 똑같은 인터넷뱅킹을 누릴 수 있다.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보험사의 지급결제 요구는 보험사가 은행이 되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특히 재벌 계열 보험사의 경우 은행을 소유하는 것과 다름없어, 은행과 기업 간 장벽을 세운 '은산분리'의 근간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예대마진 축소로 은행의 수익은 갈수록 쪼그라든 반면, 보험사의 전체 순이익은 은행과 맞먹을 정도로 커진 상황에서, 지급결제 기능마저 허용되면 보험사의 성장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지적도 나온다.

은행권이 특히 경계하는 것은 바로 삼성생명이다.

삼성생명의 지난해 말 자산은 214조원으로 하나은행(194조원)이나 외환은행(142조원)보다도 훨씬 크다. 지난해 순이익은 1조4천억원으로 신한은행(1조5천억원)에만 약간 뒤질 뿐 다른 모든 은행에 앞설 정도다.

설계사 수마저 3만명에 달해 은행권 최대인 국민은행의 직원 수(2만2천명)를 뛰어넘는 상황에서 인터넷뱅킹마저 허용될 경우, 삼성생명이 어지간한 시중은행을 제치고 소매금융의 강자로 올라서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지적이다.

보험사의 규제완화 주장도 '아전인수'식 주장에 불과하다고 은행권은 비판했다.

고객이 은행, 증권, 보험 업무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금융 복합점포를 지난해 당국이 추진할 때 삼성생명을 비롯한 대형 보험사들이 맹렬한 로비를 펼쳐 보험사만 쏙 빠지게 해놓고서, 이제 와서 '규제완화' 운운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주장이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보험사 등 2금융권의 사외이사 권한을 강화하려던 정책도 삼성생명의 반대로 무산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모든 금융정책이 삼성생명에 유리하게 흘러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따져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연구원 이석호 연구위원은 "부수적인 업무야 업종 간 칸막이 허물기를 해야겠지만, 핵심업무를 타 업권이 하도록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라며 "보험사에 지금 지급결제 권한이 없이 소비자 편익에 크게 문제가 되는지도 의문"이라고 밝혔다.'

◇ 보험사 "은행의 밥그릇 챙기기, 고객 편의에 역행"
보험사들은 은행들의 이 같은 주장이 터무니없는 '음해'에 불과하다며 지급결제 허용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저축은행, 우체국, 증권사 등 다른 금융사들에게 허용된 것은 물론 '핀테크(금융+IT기술)' 바람을 타고 IT기업에마저 지급결제 기능을 허용하려는 추세인데, 보험사에만 유독 이를 허용치 않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생명보험협회 관계자는 "금융업종 간 칸막이를 허물어 고객이 '원스톱 금융 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금융정책의 근간인데, 이를 애써 무시하고 기득권에만 집착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자세"라고 꼬집었다.

더구나 보험사에 대한 지급결제 허용으로 소매금융 부문에서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면, 그 혜택이 고스란히 금융 소비자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보험사들은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09년 증권사에 지급결제가 허용된 후 고객들은 증권사 종합자산관리계좌(CMA)를 이용하면서 보다 높은 금리를 누릴 수 있었는데, 이 같은 효과가 보험사에서도 기대된다는 것이 이들의 얘기다.

대기업 부장인 이모(44)씨는 "은행 월급통장에 돈을 넣어두면 이자가 거의 붙지 않지만, 증권사 CMA는 연 2%대의 이자를 지급한다"며 "애들 학원비 등으로 한푼이 아쉬운 상황이어서 증권사 CMA로 월급통장을 바꿨다"고 말했다.

지난 2009년 말 38조2천억원이었던 증권사 CMA 잔액은 현재 47조5천억원으로 10조원 가까이 늘었다.

대형 보험사 관계자는 "은행이 독점하고 있는 월급통장을 보험사에서 유치하려면 당연히 보다 높은 금리로 유인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고객이 얻는 혜택이 커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 같은 고객의 혜택을 외면한 채 '지급결제 불가' 주장만을 외치는 것은 결국 은행의 밥그릇울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보험사들은 지적했다.

한해 보험사가 은행에 지급하는 보험료 자동이체 수수료 등이 1천600여억원에 달하는데 이를 놓치기 싫은 것 아니냐는 얘기다.

보험연구원 이태열 금융정책실장은 "지급결제는 더 이상 특정 금융권의 독점적인 영역이 아니며 세계적으로도 은행의 지급결제 기능을 다른 산업에 개방하는 추세"라며 "업종 간 칸막이 허물기와 핀테크 발전 등 한국 금융의 미래를 위해서도 지급결제 허용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보험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