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팽개치고 놀기 좋아하던 태강임금의 실각은 백성들로부터 동정을 얻지 못했다. 제후 예(羿)의 방해로 궁에 들어갈 수 없었던 태강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다른 제후들의 도움을 구했지만 아무도 그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결국 방황하다가 죽었다. 굶어죽었는지 자객을 만나 피살된 것인지는 기록이 없다. <사기> 본문(하 본기)의 기록은 매우 간략하다. ‘계임금이 죽고 아들 태강이 즉위했는데, 나라를 잃어버렸다’(子帝太康立. 帝太康失國)는 열 글자가 고작이다. 어찌됐든 신하가 무력으로 왕권을 빼앗은 ‘최초의 쿠데타’라는 점이 저자 사마천에게는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다. 예의 반란에 대한 불쾌감은 후일의 공자(孔子)나 맹자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후일 공자 때의 일이다. 남궁괄(南宮适)이란 선비가 공자에게 물었다. “예는 활을 잘 쏘고 오는 땅에서 배를 끌만큼 힘이 셌으나 제 명에 죽지 못했습니다(羿善射 奡盪舟 俱不得其死). 그러나 우와 직(요순시대에 수리와 농사를 담당했던 천신들. 우는 하나라 임금)은 몸소 농사나 지으면서도 천하를 얻었습니다.” 공자는 괄이 자리를 뜬 후에 “군자로다, 훌륭하구나.”하는 말로 공감을 표했다(<논어> 憲問편).

태강이 쫓겨난 뒤 혼란이 거듭됐다. <사기>는 이 부분을 직접 전하지 않으나 <좌씨춘추> <죽서기년> 등 다른 사서를 통해 전해진 뒷이야기는 이렇다.

반란 직후 예는 태강의 동생 중강(中康)을 천자의 자리에 앉힌다. 그러나 실권자는 예였다. 10년의 세월이 지나자 중강은 왕권 회복을 위해 또 다른 제후 백봉을 끌어들여 예를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예를 격동시키는 결과만 가져왔다. 예는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좌를 차지한다. 그러자 하나라 유신들은 멀리 달아나 중강의 아들 상(相)을 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왕을 자처하는 예가 토벌군을 이끌고 와 성을 포위했다. 성은 함락되고 상임금은 자결했다. 이로부터 10여 년간 하(夏)는 예의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예의 권력을 위협하는 두 개의 불씨가 자라고 있었다. 하나는 정권 내부에서 자라났다. 예는 중강에게 협력한 백봉을 제거하면서 백봉의 어머니가 천하절색 미인인 것을 보고 끌어다 왕비로 삼았다. 그녀의 이름은 현처(玄妻)로 기록돼 있다. 자기 손으로 제거한 사람의 혈육을 내실로 삼은 것은 오만한 자충수였다. 현처는 자식의 복수를 꿈꿨다. 그녀는 예의 심복인 한착(寒浞)과 가까이 하다가 정을 통하여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기회는 곧 찾아왔다. 본래 천자의 그릇이 아닌 예가 스스로 왕이 된 뒤 향략에 탐닉하며 문란해졌던 것이다. 민심이 그를 외면하게 되었을 때 한착은 자기 아들과 오와 함께 예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논어>에서 힘센 사람으로 거론된 오(奡)가 바로 한착의 아들이다.

예를 위협한 또 하나의 불씨는 상 임금이 남기고 간 유복자였다. 성이 함락될 때 상은 임신중인 왕비를 은밀히 친정으로 피신시켰다. 거기서 숨어 기른 아들이 자라나 군사를 일으켰다. 아들은 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한착을 물리치고 왕권을 되찾았다. 정당성도 없고 민심도 얻지 못한 없는 쿠데타 정권은 힘없이 무너졌다. 하 왕실을 되찾아 부흥시킨 새 왕의 이름은 소강(少康)이다. 태강부터 소강이 나라를 되찾을 때까지 혼란기는 60여년이나 됐다.

- 이야기 Plus
태강 임금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쫓겨난 것은 응당한 일이다. 그러나 게으르거나 부패한 왕은 징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 징벌을 행하는 자가 더 좋은 정치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 될 수도 있음을 이 사건은 보여준다. 지도자가 무능하여 불만이 고조됐을 때 그 체제를 무너뜨리는 일은 아주 손쉬울 수 있다. 하지만 그 일을 누가 대신할 수 있느냐 하는 대안(代案)이 먼저 준비되어야 한다. 전보다 더 문제 많은 사람, 심지어 자격조차 안 되는 사람들이 전왕을 물리친 공로만 가지고 군주가 된다면 상황은 오히려 더 나빠진다. 우선 통치권이 혼란스러워졌다는 것만으로도 백성에게는 재앙이다.
정치에서나 기업에서나 현재의 지도체제에 문제가 있다면, 그들을 비난하고 탄핵하기에 앞서 그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을 먼저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분명한 대안이 계획되지 않은 개혁은 하나마나한 개혁일 것이다.
큰 홍역을 겪고 난 하 제국은 소강 이후 1백여년간 중흥하였다. 하지만 절정이 지나가면 쇠퇴기가 오는 법. 11대 불강(不降) 임금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아우 경(扃)에게 물려주었다. 경이 즉위할 때 하늘에는 요사한 빛이 나타나 열흘이나 머물렀고, 12년 후 경의 아들 근(廑)이 즉위할 때는 하늘에 10개나 되는 태양이 떴다. 이것은 왕권을 능가하는 제후들이 많았음을 의미하는 기록인 듯하다. 하나라 왕국 470년 역사가 이때로부터 확연히 기울기 시작했다. 근 임금은 즉위한 그 해에 바로 죽고, 그 뒤를 불강의 아들 공갑(孔甲)이 차지했다. 왕위가 왔다갔다한 것이나 불길한 징조들이 기록된 것으로 보면 필경 피비린내 나는 왕권다툼이나 전쟁에서의 실패 등 우환이 있었을 것이다.
공갑은 적통을 이어 왕권을 되찾았지만, 문제가 많은 왕이었다. <사기>의 기록.
‘공갑 임금은 즉위한 후 귀신을 좋아하였으며 음란하였다. 하후씨의 덕망은 이때부터 쇠퇴해져서 제후들이 배반하기 시작했다.’
공갑은 중국 역사상 대표적인 혼군(昏君=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공갑에게는 하늘로부터 받은 용 한 쌍이 있었는데, 어느 날 암컷 한 마리가 죽어버렸다. 그것을 기르던 사람(유루)는 이 사실을 숨긴 채, 용을 잘 요리하여 임금의 수랏상에 올렸다. 임금은 이 맛있는 고기를 더 구해오라고 하자, 용을 낚을 줄 모르는 유루는 용을 구하러 가는 척하고 멀리 달아나버렸다. 상서로운 동물인 용을 잘 기르지 못하고 잡아먹었다는 얘기는 그가 백성을 잘 돌보지 못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다.

丁明 : 시인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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