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직자의 미덕

過家門不敢入 과가문불감입
제집 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못하다
공직자가 개인의 일을 뒤로 하고 오직 공무에 충실함을 비유하는

정해용
시인

‘공인(公人)’이라는 말은 매스컴에도 자주 오르내린다. 사회적으로 공공의 이익과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 즉 공직자를 주로 일컫는 말이지만, 요즘은 사회에 공개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까지 폭넓게 지칭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학 교수라든지 연예계나 스포츠계의 스타들, 잘 알려진 작가와 방송인 신문기자까지 공인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직접 공직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공공의 이익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면 다 공인으로 칭하자는 묵시적 공감이 이루어져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공인들에 대하여 개인의 사리사욕보다는 공적인 의무에 더 충실해줄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대중에게 좀 알려졌다 해서 누구나 사생활을 희생해야 할 의무를 져야 한다는 건 좀 가혹하다. 넓은 의미의 공인 모두에게 개인적 소신이나 사생활의 이익을 양보하라는 요구는 하지 말기로 하자.

그러나 공공의 세금으로 녹을 받는 공직자라면 좀 다르다. 물론 그들의 사생활은 보장되어야겠지만, 적어도 공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는 사리사욕을 떠나 공정하고 냉정하게 중심을 잘 지켜야 한다. 그래야만 그 사회 공동체가 공정하고 깨끗하게 중심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고관들이 모여 사는 동네는 도로정비나 복지시설이 제대로 운영되고 그렇지 않은 동네는 도로부터 시설까지 관리조차 제대로 안된다면 과연 시민들이 나라의 공직 시스템에 대하여 신뢰를 갖겠는가.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을 때 재벌 아들이 받는 처벌과 시장 노점상의 아들이 받는 처벌이 다르다면, 과연 시민들이 나라의 공권력을 존중하고 싶겠는가. 공직 시스템과 공권력이 불신을 받게 되면 그 사회 자체의 안전은 점차 위협을 받게 된다. 시민들로부터 존경심을 잃은 공직사회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요순시대(堯舜時代)가 이상적인 성군의 시대며, 백성들이 모두 행복하게 지내던 태평성대였다고 여긴다.

지금으로부터 4,000년 넘게 지난 고대의 일이기 때문에, 과연 완벽하게 깨끗하고 행복한 시대였을까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그런 태평성대는 전설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록을 보면 요나 순임금은 그들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인(神人)이 아닐 뿐더러, 요즘이나 다름없이 시기 질투가 난무하는 인간세계 속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 어려운 난관을 헤쳐 나가며 인간적인 모범을 보였고, 존경을 얻었다. 종교적 환상이나 초자연적 능력에 의존해 나라를 다스린 게 아니라 철저히 과학적 합리적인 지혜와 인고의 노력으로 이상사회를 일궈냈다.

요 임금으로부터 무려 20년 동안의 시험을 거쳐 후위를 물려받은 순 임금은 신하들의 임무를 분장하여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조직과 인사관리 시스템을 만들었다.

먼저 신하들의 직책을, 각각의 성격과 특기를 참고하고 전체 중신들의 의견을 물어 스물두 가지로 나누어 맡겼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전문 관직제도다. 지금의 ‘내각’이라 할 수 있는 직제와 담당 관리들의 이름까지 <사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나라는 12개의 주로 나누고, 12주를 다스리는 장관들을 불러 제왕이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 서로 의논하게 하였다.

임명된 신하들에 대한 인사관리도 합리적이었다. 신하들의 실적과 평판을 3년마다 한 번씩 평가하고, 세 번의 평가 결과를 근거로 직위를 강등하거나 승진시키는 인사고과를 제도화했다. 자연스럽게 각 신하들의 임기가 보장되게 한 셈이다.

그 결과 경향 백관들의 업적이 하나같이 올라갔다. 그로부터 4천년 넘게 지난 지금의 현대 국가들 가운데도 직무의 효율성이나 엄격한 신상필벌의 원칙을 제대로 세우지 못해 혼란을 겪는 나라가 얼마나 많은가.

여러 신하들이 자기 몫을 잘 해냈지만, 특별히 중신들의 추천으로 치산치수를 맡은 우(禹)의 공적이 남달랐다.

물길을 다스리는 일은 당시에도 가장 큰 과제였다. 해마다 홍수가 나서 불어난 강물이 들판을 휩쓸면 주거지는 물론 경작지가 폐허가 되고 길은 사라지니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찍이 이를 고민한 요임금이 곤(鯀)이라는 사람에게 치수사업을 시켰으나 거듭 실패만 하다가 귀양을 갔는데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거기서 죽었다.

우는 바로 곤의 아들이었다.
우는 기주에서 치수사업을 시작한 이래 오로지 산과 들에 머물며 일에 몰두하여 13년만에 전국의 물과 물, 산과 산을 소통시키고 9산9천을 다스리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홍수가 해결되고 백성의 살림이 풍요로워지니 우를 칭송하는 소리가 사방에 끊이지 않았다. 우가 만든 물길들은 이후 夏-殷-周 세 왕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그 덕을 보았다.

집과 공사현장의 거리가 멀기도 했겠지만, 우는 그 13년 동안 간혹 서울을 지나는 일이 있어도 집에 들르지 않았다.

<사기>에 ‘우는 아버지 곤이 실패하여 처벌받았던 일을 거울삼아 심신의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밖에서 13년을 지내는 동안 혹 자기 집 앞을 지나는 일이 있어도 감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勞身焦思 居外十三年, 過家門不敢入).

우는 결혼한지 나흘만에 집에서 나왔는데, 사업을 마치고 돌아갔을 때 아들 계(啓)는 열세살이 되어 있었다. 후일 맹자도 이를 언급하여 삼과기문이불입(三過其門而不入)이라며 우를 칭송했다.

고대 설화에 인간을 괴롭히는 용을 처치한 영웅이 제왕이 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전설 속의 용이란 대개 홍수로 인해 범람하는 강을 상징한다. 따라서 물을 다스린 자가 천하를 얻었다는 얘기가 된다.

중국 최초로 황하를 다스린 우는 순 임금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로부터 전설 속 삼황오제의 뒤를 잇는 하(夏) 왕조가 시작되었으므로 그를 하우(夏禹)라 일컫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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