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은 한가했고 조용했다. 나는 모처럼 지하철 좌석에 앉아 하성란의 소설 <1984>를 펼쳤다. 소설 속 유리겔라는 수십 개의 숟가락을 휘었고, 법원 실내 체육관에서는 실업계 고등학교 예비 취업생들이 타자 시험을 치르기에 바빴다. 장맛비에 젖은 밖과는 달리 지하철 객실은 뽀드득 소리가 날만큼 뽀송뽀송 했다.

흰색 블라우스에 검정색 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한 손에 A4 용지 몇 장을 들고 내 앞에 섰다. 객실 내 공간이 많은데도 흰 블라우스는 굳이 내 앞에 섰다. 나는 꼰 다리를 다소곳이 풀었다. 나는 경우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흰 블라우스가 A4 용지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조금만 귀 기울이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소음이었다. 영어회화인 듯했다. 승객들이 그녀를 힐끗거리며 바라봤다. 나도 노려봤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흰 블라우스의 혀는 유리겔라 숟가락처럼 말려있었고 에프 발음을 할 때마다 대문니로 아랫입술을 심하게 깨물었다. 애먼 나의 아랫입술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한 번 들어오기 시작한 그녀의 소음은 귀전에서 계속 프, 프 거렸고, 하성란의 <1984>는 1984년으로 되돌아가버렸으며, 소설 속 실내 체육관 타이프 소리는 타닥탁탁에서 프프으. 프프로 뒤바뀐 지 오래였다. 나는 그녀가 내일 아침 아랫입술에 파스를 붙이고 출근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나는 다리를 크게 꼬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러자 그녀가 내 다리를 슬쩍 피하며 조금 멀어졌다. 그러고 보니 프프, 소리도 좀 멀어진 듯했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다시 <1984>를 펼쳤다.
이번 정차역은 신당, 신당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내 옆자리에서 흰 블라우스를 째려봤던 중년 남자가 한참이나 그녀를 노려보더니 출입문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가 잽싸게 내 옆 자리에 앉았다. 오 마이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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