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옛 시인 소동파가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난 다음에 세 사람의 첩을 앞에 놓고 물었다. 지금 자기 뱃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겠느냐고. 처음 여자와 두 번째 여자는 저녁에 먹은 밥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 번째의 조운(朝雲)은 이렇게 대답했다. "임의 뱃속에는 철(계절)이 지난 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소동파가 기다리던 대답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나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두 여인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묻는 사람이 소동파고, 그가 시인이고, 또 그처럼 평범한 물음에는 필시 평범하지 않는 응답에 대한 기대가 있을 것이라는 추리의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조운과 같은 대답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두 여인은 상식의 틀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그만큼 피동적이며, 소극적인 사고에 따른 것이다. 이에 비해 조운은 상식의 틀을 부정하는 사고를 따랐다. 예나 지금이나 두 여인과 같은 타입은 너무나도 많고, 조운과 같은 타입은 너무나도 드물다. 그러나 조운과 같은 창조력은 누구나가 본래 가지고 있는 인간의 특성이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놀면서 새로운 놀이를 생각하는 것도,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체계화한 것도, 혹은 주부가 부엌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도 모두가 창조력의 소산인 것이다. 누구나가 창조력이 있기를 막연하게 바라고 있지만, 자기에게는 창조력이 없다고 체념해 버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따라서 본래 가지고 있던 창조력은 굳어지고, 결국 이를 활용하지 못한 채 창조력의 씨앗을 말려 버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창조력이란 결코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능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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